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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버린 패물과 현금통장(퍼온글)


BY 카메론디아즈 2003-02-22

지방에 출장을 가는 길. 오랫만에 타보는 장항선 무궁화열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참으로 다정하게 다가온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저만치 이미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해방감을 맛볼 수 있으니, 평소에
우리들은 얼마나 무거운 삶의 하중에 눌려 살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된다.
신문을 보며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는 필자의 건너편 줄엔 60대에 들어섰을
남자 네명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친구들 사이같았다.
그들의 살아가는 얘기는 필자의 귀에 자연스럽게 들려왔고, 이웃의
삶이 겪어가는 각기 다른 사연들에 관심이 생기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필자의 귀에 특별한 여운을 남긴 사연은 패물과 통장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의 짐작으로 광고회사를 운영하는 남자일 것같은 그 사람은
자기의 어머니 이야기를 꼭 무슨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풀어놓았다.

"나 참 우리 어머니도---.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 형님이 지방으로 가는
바람에 어머니를 내가 모셨잖아. 우리 집사림이 고생많았지.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모시고나서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형수가
어머니의 패물과 통장얘기를 꺼내는거야. 나나 집사람은 전혀 모르는
얘기였는데, 형수 얘기가 그전에 분명히 어머니가 패물과 현금통장을
가지고 계셨다는거야. 맏며느리로서 그걸 체크해봐야겠다는 거였어.
그런데 집사람은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까 모른다고 했는데 형수는
집사람을 오해해서 이상한 뉘앙스의 얘기를 했고, 그렇잖아도 시어머니
모시느라 고생을 한 마당에 엉뚱한 오해까지 받으니 펄쩍 뛸수밖에.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안되겠더라구. 그래가지고 우리 3남1녀 형제들을
자기 아이들까지 모두 소집을 해서 그 패물과 통장 건에 대해 조사를 해
본거야. 나도 우리 집사람이 오해를 받는게 싫었고, 밝힐 건 밝히고 넘어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어. 그래 어린 조카들까지 다 모여서 어머니의
사라져버린 패물과 통장얘기를 해봤어.
그런데 참 나도 기가 막혀서. 글쎄 패물은 내 밑에 동생녀석의 아들 거
왜 창근이라고 있잖아? 고등학교 2학년짜리. 그 녀석한테 가있는거야.
창근이가 얘기하는데 어느날 할머니가 자기를 부르더니 패물을 주시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고 하시더래.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 형도 딸만
하나를 뒀고 나도 딸만 둘 뒀잖아. 그런데 내 밑에 동생은 아들 창근이가
있잖아. 그러니까 창근이가 우리집안의 장손이니까 그 녀석이 나중에
당신제사라도 지내드리겠지 하신 모양이야.
(이때 다른 남자가 '그럼 통장은 어떻게 됐어?'하고 물었다)통장은 알고
보니까 막내 현숙이한테 주셨더라구. 포항에 사는 막내여동생 그애 알지?
그애가 제일 못살잖아. 어머니가 늘 그애때문에 걱정하셨잖아. 가난하게
산다고. 현숙이 얘기도 어느날 어머니가 자기를 부르시더니 통장을 주며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로 얘기하지 말라고 하더래. 그 얘기를 하면서
그애가 울음을 터뜨리는데 식구들도 다 울었잖아. 형수는 우리 집사림한테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고. 아무튼 패물과 통장의 행방이 밝혀져서 속은
시원했는데, 참 노인네 마음쓰신걸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아리더라구."

남자들은 잠시 아무도 말을 안하는지 그쪽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손주한테 남몰래 당신의 패물을 남겨주었던 일,
가난하게 사는 막내딸이 늘 안스러워서 마지막 가시는 순간에 평생토록
간직했을 통장을 물려준 일. 이 세상에서 딱 한번 만나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헤어지는 부모자식간의 그 애틋한 정이야말로
가장 숭고한 것이 아닐까?
창밖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겨울의 잔해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출처:column.dreamwiz.com/19594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