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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과 나 그리고 이라크 파병(퍼옴)


BY speed259 2003-04-01

돼지껍데기 http://www.hanjeomman.com 에서 퍼왔습니다.



월남전과 이라크 파병과 나. 3-31-2003

나는 지금으로부터 서른 여섯 해 전인 1967 년 8 월, 주월 백마부대의 한 졸병으로 월남 땅을 밟았다. 만기 제대를 일년 여 남겨놓고, 공산군을 무찌른다거나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한다거나 하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나 또래의 중간치 졸병들이 다 그랬듯이, 군대 생활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따분하고, 제대 후 학교 마치고 어쩌고 하는 현실 문제로 답답하던 참이었다. 전투 훈련이다 뭐다 하며 몇 달 보내고, 배타고 가고 오고, 그러다 보면 지겨운 따라지 군대 생활 휘딱 지나가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다른 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실제 전투에 참가해 보겠다는 어줍잖은 용맹심, 혹시 죽을지도 모르는 모험에 대한 동경심 등이 월남전에 자원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행인지 불행인지 정보 계통 부대에 배속 받아 실제 전투에 참가할 기회는 없었지만, 월남전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월남은 참 아름다운 나라였다. 끝도 없이 펼쳐진 원시림의 정글과 눈이 시릴 정도의 오염되지 않은 푸른 하늘과 바다, 한편에서 모를 내고 바로 옆에서 추수를 하는 일년 내내 농사가 가능한 나라, 지천으로 널려있는 바나나를 비롯한 열대 과일들, 더 할 수 없이 자연의 혜택을 받은 나라. 왜 이런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까, 늘 궁금했다.

백마 사단은 월남 최대의 군수물자 하역항 캄란 베이를 지켰던 연대를 포함해 그 나라의 중부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래의 한국 대통령 두 사람이 그곳에서 연대장으로 근무한 인연이 있기도 하다.
요즘의 반미, 미군 철수 운동 등을 보며 그때를 떠올리면, 세월이 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나, 가슴저린 불안과,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 판단과 헛된 욕심이 어떤 결과를 갖고 오는지 새삼 전율에 몸을 떤다.

그때의 한미 관계는 정말 우방이라는 말이 그대로 실감나는 때였다. 보급품을 운반하던 미군의 긴 컨보이 대열은 어둠이 내리기 전에 한국군 부대 주변에서 밤을 샐 준비를 했다. 어느 곳보다도 한국군 부대 옆이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마음놓고 쉬어 가곤 했다. 그들은 한국군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것이다. 월남군은 말할 것도 없고 오죽하면 저희 미군 부대 보다도 우리 한국군 부대가 더 안전하게 느껴졌을까. 미군들은 우리를 보면 반갑고 안심했으며 우리도 미군을 만나면 정말 친구처럼 가깝게 느꼈다. 전장에서 나눈 우정은 피를 나눈 우정이기 때문에 쉬 잊혀지지 않으며 항상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미군과 같은 기준으로 보급품을 받고 무장을 했으며 모든 면에서 미군 기준의 대우를 받았었다. 미군 기준의 완전 군장을 마쳤을 때,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이 너무 많고 우리 체격에 맞지 않아 제대로 일어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한국군의 무장이래야 맨몸에 가까웠고, 이 모든 장비 무기등을 귀국하면서 갖고 옴으로서 한국군의 현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나중 들은 이야기이지만, 월남 참전 때부터 한국군의 장비 무기등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미군은 실전에 참가하는 군인들에게는 전투 참가비를 지급했다. 우리도 물론 그들과 같은 수준의 수당을 받았으나, 한미간의 협정에 의해 우리 수당은 대부분 한국 정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이것을 탓하지 않았다. 그 돈이 한국의 경제 개발과 국토 건설에 쓰인다고 믿고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었다. 그야말로 싸우면서 잘 사는 조국건설에 이바지 한 것이다.



반전 반미를 외치는 철없는 사람들은 우리 참전 군인들을 용병이라 폄하하며 업수이여기는 데, 만약 월남 참전으로 숨통이 트이지 않았으면 지금의 우리가 이런 수준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겠는가. 상품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내다 팔아 돈을 버는 것이나 기술자 노동자로 나가 돈을 버는 것이나 다를 게 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월남 참전으로 단순히 돈 만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6.25로 약 4 만 명의 목숨을 우리 위해 바친 미국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 꼴이 되었고, 혈맹으로서의 진정한 친구를 얻은 셈이었다. 약 8 년 동안 300,000 명 이상의 참전으로 우리 군은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고 또 그 만큼 많은 젊은이들이 실전 경험을 했으며 자주 국방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명분론을 앞세운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외면하는 가운데 힘겹고 고된, 승산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으며, 마침 한국의 참전에 무척 고무되고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우리를 자신들과 똑 같이 대우해 주었으며, 독자적인 작전권은 물론 군수 물자의 수송과 상 하역, 도로 항만 군 시설을 비롯한 모든 건설 공사에 한국 업체의 참여를 적극 도왔고, 고추장 된장 김치, 장글복 군화등 한국군이 필요로 하는 군수 물자의 제조 납품을 맡겨, 가능한 한 우리를 도우려 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전근대적이며 원시적인 농업 사회로부터 건설 제조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하게되었다.

종전 후 월남전에 참여했던 건설 운송 업체들은, 석유 파동으로 중동에 건설붐이 일어나자 그 곳으로 가서 외화 획득의 첨병이 되었다. 월남 참전과 중동 건설 참여는 한국을 수 천년의 가난과 질곡으로부터 탈출케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마치 한국의 6.25 전쟁으로, 2 차 대전 패배의 잿더미에서 일본이 일어나 경제 대국을 이룬 것과 같이, 한국도 월남 참전으로 근대화의 길목으로 들어섰다고 믿는다. 그 때는 별 자의식 없이 따분한 군대 생활을 빨리 보내려고 참전했으나, 지금 돌이켜 보면 조국의 근대화, 배 곪지 않는 삶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탰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 당시 파병을 반대한 사람들은 바로 전직 두 대통령들이었으며, 그들은 고속도로를 건설한다고 하자 극구 반대했다. 고속 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돈 있는 사람들이 놀러나 다니고 북한 공산군이 쉬 침공해 내려온다는 게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얼마나 한심한 생각이며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안목 없는 지도자들이었는가.

열 네 달 동안의 월남 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68년 1.21 공비들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었다. 월남 참전으로 급속히 변해 가는 남쪽의 국력과 경제력. 전투력에 북쪽이 안달한 결과 저지른 불장난은 아니었을까. 그 때문에 제대가 석 달이나 늦어져 곤욕을 치뤘다.
지금 다시 이라크에서 미국이 전쟁을 하고 있다. 월남이 망하고 공산 정권이 들어 선지 30 년, 그 곳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때 반전 운동을 하며 미국을 비난하다 공산군이 쳐들어오자 도망갔던 한 불교 중이 한국에서 마치 부처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도와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한국이 가능했을까? 경제 개발, 중공업 입국, 수출 지상 주의 등 세계 11 위의 경제대국이 이 이뤄지기는커녕, 북한에 의한 통일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군사 정권, 유신 타도 등으로 사사건건 당시 정권의 발목을 잡아끌지 않고 온 국민이 월남 참전 군인들처럼 목숨을 걸고 싸우면서 건설하고 수출입국의 대열에 나섰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남쪽에 의한 통일을 이루고 세계 5 위쯤의 경제 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군이 우리보다 많이 주둔한 일본과 독일이 세계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잘 사는 경제대국 아닌가. 독일은 우리처럼 분단에서 통일을 이루었고, 일본은 미군정의 통치를 받은 나라이다. 그 두 나라가 우리 보다 못 살아서, 또 자존심이 없어서 미군의 주둔을 허락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 나라에 전쟁이 난다고 가정하자. 누가 달려와서 우리와 나란히 싸워줄 것인가. 중국인가? 소련인가? 아니면 독일 ? 프랑스? 우스운 것은 북한이 철천지 원쑤로 여기는 미국이 지금도 가장 많은 원조를 북한에 하고 있다. 중국은? 소련은? 독일은? 프랑스는 얼마나 북한을 돕고 있으며, 누가 북한과 담판을 하려고 나서기나 하는가?

미국은 우리가 6. 25 때 진 빚을 월남 참전으로 갚은 것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미국이 이곳에 주둔하는 한 미국 기업 뿐 아니라, 온 세계의 기업이 우리에게 투자하려 할 것이다. 미국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땅에 누가 들어와 머물겠는가.

40 여 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그 당시 파병을 반대한 사람들이 누구였으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가 더 발전하고 통일될 수 있는 기회마저도 어떻게 헛되이 했는지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라도 나를 불러만 준다면, 그 곳이 어디라도 기꺼이 달려가서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것이다. 월남전 때는 멋도 모르고 젊은 객기에 얼렁뚱땅 다녀왔지만, 지금은 비록 몸은 늙어 말은 제대로 듣지 않지만, 더 현명한 판단과 실리를 앞세워 조국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