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atles Story -------------------------------------------------------------------------------- 모든 훌륭한 예술가들이 갖는 놀라운 점이란 예술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현실을 표현한다는 데에 있다. 그만큼 그는 자기가 몸 담고 있는 현실의 움직임과 발전경향을 정확하게 예술에 반영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사회현실 사이의 투쟁갈등, 그리고 자신의 사회적 실천을 이뤄낸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점에서 196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비틀즈는 그러한 훌륭한 예술가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 드문 예에 속하는 음악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Rock을 코스모폴리탄 음악으로서 전세계에 획기적으로 도약시켰으며, 그로써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어둡고 침울하던 서구사회에 떠들썩하고 시원스러우면서도 밝고 힘찬 진보적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비틀즈가 나타나기 직전 서구음악계는 Pat Boone, Paul Anka, Neil Sedaka 등의 소위 '질 좋은' 틴아이돌 스타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상태였다. 50년대 정통 록큰롤은 보수세력들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아 그때 이미 자취를 감춰버린 상태였고, 젊은이들은 거칠고 대담한 록큰롤음악대신 달콤하고 세련되면서도 어딘지 헛헛하고 유치한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의 음악이나 부르면서 멍청한 감탄이나 순진스런 비애 속에 빠져지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비틀즈는 음악산업의 변방이라 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욕설이 난무하는 뒷골목에서 자신들의 음악을 가꿔갔으며, 초기의 음악에서 그들은 미국의 록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를 열심히 커버하고, 척 베리의 기타 스타일, 크리케츠의 밴드 사운드, 에벌리 브라더스의 코러스 하모니, 리듬앤블루스의 비트들을 연결하는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 그들의 초창기는 어느 그룹이나 다 그렇듯 비참함으로 시작되었다. 각각 뱃놈의 아들(존 레논), 곧 파산할 솜장수의 아들(폴 메카트니), 버스운전수의 아들(조지 해리슨), 페인트공의 아들(링고스타)이었던 이들은 지지리도 가난했고, 특히 존과 링고는 부모가 이혼한 상태였다. '쿼리맨'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무명시절에는 공연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고, 백밴드 시절에는 하루 세끼조차 제대로 못 먹었을 뿐 아니라 스트립쇼 백밴드를 뛰기도 했다. '비틀즈'라고 이름을 바꾸고 함부르크로 떠났을 때는 거의 막가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나 지금이나 함부르크는 매춘부, 선원, 깡패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고, 특히 이들이 활동한 클럽(인드라, 카이저켈러 등)은 함부르크내에서도 가장 슬럼가인 레에퍼반이라는 곳에 위치해있었다. 함부르크 사람들은 단순히 음악을 들으러 클럽을 찾는 게 아니라, 싸움질을 하러 준비를 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웨이터들도 품속에 잭나이프 하나 정도는 간직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여기서 비틀즈 멤버들은 돈을 벌기 위해 미친 놈처럼 무대를 뛰어다니며 광대노릇을 해대야 했고, 목욕탕 없이 몸은 변소에서 대충 씻으며, 하룻밤에 6~8명의 여자들과, 파트너를 바꿔가며 섹스하는 난잡한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실력 없는 밴드를 용서해주지 않는 이곳 분위기에서 목숨을 걸고 공연을 하면서 비틀즈는 음악적으로 급성장을 하게 된다. 다시 리버풀로 돌아와 공연을 했을 때는 벌써 수백명의 관중들이 무대를 덥치며 훗날의 비틀매니아들과 같은 난리 해프닝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캐번클럽의 단골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면서는, 여성팬들이 열광하다 기절하기 일쑤였고, 급기야 리버풀의 어느 유태인 레코드상이었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에 의해 그들이 전국무대에 진출하게 될 때에는, 이미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곧 벌어질 그들의 세계정복을 예측하고 있었다. '62년 10월 'Love Me Do'로 데뷔한 이래 두번째 싱글인 'Please Please Me'가 전영 넘버원을 획득하며 '63년에는 영국 전체가 비틀즈붐에 들끓기 시작한다. 이어 그들은 '64년 'I Wanna Hold Your Hand'로 전미, 그리고 차츰 전세계로 그 영역을 넓혀감으로써 명실상부한 사상최고의 록밴드로 군림하게 된다. 생각해 보라. 독일과 영국 바닷가의 더러운 공업도시 함부르크와 리버풀에서 그것도 뱃놈들이나 노동자들의 술집에서 어릿광대짓이나 하던 작은 밴드 하나가 어느 순간 세계를 정복해버린 것이다. 비틀즈는 초기 음악부터 불량스럽고 거칠며 반항적이었다. 이는 그들의 인기기반이 최초 영국 노동자계급청년들로부터 구축된 것이었으며, 그들의 음악이 당시로서는 꽤 강한 비트를 가졌던 데 기인한다. 'A Hard Day's Night'이나 'Can't Buy Me Love'과 같은 노래들을 들어보면 생생한 비트 못지 않게 값싼 노동에 혹사당하고 계급적 울분을 삭이는 무식하고 가난한 하류층 젊은이들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한 번 가사들을 읽어보자. "엄청 뺑이친 날 밤이었지. 나는 개처럼 일했어. 엄청 뺑이친 날 밤이었지. 나는 통나무처럼 잠자고 있어야 했어. ..." - A Hard Day's Night - "난 네게 다이아몬드반지를 사줄 거야, 친구야. 널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면 말야. 난 네게 뭐든 갖다 줄 거야, 친구야. 널 기분 좋게 할 수 있다면 말야. 난 돈에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 돈으로 사랑을 살 순 없으니까. ..." - Can't Buy Me Love - 얌전한 틴아이돌스타와 포크송, 트위스트 등에 식상해있던 미국의 청소년들은 이들의 이러한 음악에 열광했다. 미국상륙후 두달만인 1964년 3월에는 빌보드 순위 1위부터 5위까지를 모두 비틀즈의 곡이 휩쓸었다. 당시 미국 전체 싱글 레코드 매상액의 6할이 비틀즈의 레코드였다. 8월에서 9월 사이에는 전미투어를 가졌는데 이들이 움직일 적마다 흥행기록은 매일 바뀌었다. 얼마나 깨지고 새로운 기록이 만들어졌는지 나중엔 비틀즈의 새 기록을 확인하는 데 모두 무관심해져버렸다. 비틀즈가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 원인에는 먼저 그들의 효과적인 남성 하모니가 있었다. 존 레논의 리드보컬과 폴 메카트니의 높은 화음, 조지 해리슨의 낮은 화음은, 단순히 주 멜로디 라인에 몇도의 화음을 넣는다는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화음 자체를 하나의 음으로 인식하여 곡의 전개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연주능력은 기량면에서 그리 신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멜로딕함을 강조한 링고의 드러밍이나 박자 이상의 독립성을 갖고 있던 폴의 베이스는 무척 파격적이었다. 또한 혹독한 수련기간으로 다져진 그들의 라이브감각은 난데 없는 괴성이나 '추임새'로 표출되었고, 길이가 긴 고음의 후렴구들은 당시에 거의 드물던 기법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앨범이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이유는 그 강력한 비트에 있었다. 하드록이나 메탈밴드의 강력한 음악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비틀즈의 록 정도는 그저 상큼하게 들릴 뿐이지만, 그 당시로서 비틀즈의 음악은 엄청난 에너지와 강한 비트를 지닌 것이었다. 지금은 가장 일반적인 형태지만 비틀즈는 이때 거의 최초로 레논의 리듬 기타와 해리슨의 리드 기타로 두 대의 기타를 두어 기타의 강한 맛을 살렸다. 레논의 정력적이며 강력한 리듬 스타일은 미국의 록커빌리에 의해 변형된 포크및 블루스에 기반한 것이다. 그는 다양한 장르에 기반한 코드감각을 가졌다. 이것은 탁월한 메가트니의 멜로디 감각과 결합하면서 최상의 작곡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한편 해리슨의 리드기타는 칼 퍼킨스나 쳇 애킨스 같은 컨트리 뮤지션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해리슨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작곡능력을 다양한 사운드에 대한 탐구로 커버한 노력형 기타리스트였다. 베이스와 드럼의 반복적인 비트도 참신한 것이었고, 전체적인 사운드를 만드는 데 베이스의 바탕을 강조한 것 역시 새로운 것이었다. 밴드 내에서 연주력은 가장 뛰어났지만 작곡능력이 없어 눈길을 끌지 못했던 링고의 드럼도 비틀즈의 독특한 비트를 빚어내는 데 기여한 바는 컸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척 베리와 버디 할리 이후 기타-드럼-베이스의 악기 배치형태를 정형화시켰으며 이것은 지금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들이 이렇게 간단한 밴드의 형태를 굳힌 것은 그 의미가 무척 크다. 여태까지의 음악은 한명의 뛰어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오케스트라가 보조하는 방식이었던 데 비해서, 밴드는 아무나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그룹구성원간의 비교적 동등한 관계를 기초로 연대라는 중요한 코드를 내포했기 때문이다(설령 밴드 내에 더 튀는 인물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밴드는 대체로 상호 의견존중을 기본으로 한다). 이는 사이키데릭기에 있어서 관중과의 연대로 이어지며, 인류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록페스티발이라는 것과도 연결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는 계속되는 공연을 지칠 줄 모르고 커버할 수 있던 가공할 체력이 있었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그들은 케네디 사후 영웅공백상태에 있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우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틀즈는 이러한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65년에는 'Rubber Soul', '66년에는 'Revolver'등의 앨범을 내며 사이키델릭 록으로 음악적 지평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옛날보다 환각적이고 현란하며 고급스러워진 음악을 선보인 이들은 더욱 세련되면서도 심오한 사운드를 과시했다. 특히 이때 비틀즈는 집단 기자회견을 통해 베트남전쟁 반대를 선언하고 각종 사회활동을 통해 무조건의 사랑과 평화를 역설했다. 이로써 비틀즈라는 이름은, 성공한 노동계급과 대항문화, 프리섹스와 마약, 그리고 진보운동의 모순된, 그러나 가장 강력한 60년대적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존 레논이 1966년 7월 "비틀즈는 이제 예수보다 더 인기가 있다(Beatles is More Popular than Jesus)"고 발언한 게 과격한 기독교도들의 저항을 받게 되자, 비틀즈는 일대위기에 처하게 된다. 미국 남부에선 비틀즈 레코드 배척운동이 일어났고, KKK단은 비틀즈 허수아비를 태웠다. 멤피스 공연에선 8천여명의 KKK단원들이 시위를 하면서 무대에 쓰레기를 던지고 폭죽을 터뜨렸다. 결국 1966년 8월 샌프란시스코공연을 마지막으로 비틀즈는 라이브활동을 중지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후 오랜동안 스튜디오에 파묻혀 있던 비틀즈가 다음해에 발표한 앨범이 바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이다. 록의 황홀경이요 만화경과도 같던 이 앨범에서부터 초기 비틀즈가 보여주던 거칠고도 생생한 비트는 사라졌다. 이는 비틀즈가 라이브활동을 중단함으로써 치러야 했던 값비싼 대가였다. 여기에 사실상 제5멤버였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마저 '67년 8월 죽어버리자 비틀즈는 그 팀웍마저 흐트러지게 되었다. 이후 마약중독과 록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공룡 밑에서 무기력해진 그들의 모습은 단지 약삭빠른 레코드회사들에 의해 온통 과대포장되어 팔아먹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진정 세계평화의 전령이 되고자 했지만 미디어의 무시무시한 밀림은 그들을 조롱했다. 존 레논이 일본인 전위예술가 오노 요코와 놀아나고, 폴 매카트니는 린다 이스트만과 만나기 시작하면서 습관처럼 지속됐던 존과 폴의, 음악을 위한 공동작업시간 역시 줄어들었다. 한편 엡스타인이 죽자 영향력 있는 여러 매니저들이 앞다투어 비틀즈를 위해 일하겠다고 제안해왔는데, 레논은 롤링스톤즈의 매니저이기도 했던 알렌 클라인에게 관심을 가진 반면, 매카트니는 나중에 장인과 처남이 될 사람이 뉴욕에서 운영하고 있던 이스트만 앤드 이스트만 법률사무소 쪽을 선호했다. 조지와 링고는 존 레논의 편에 섰지만,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나서 일주일이 지난 뒤 폴이 비틀즈를 떠나겠다고 선언했을 때 비틀즈는 공식적으로 해체된 셈이었다. 1970년 비틀즈가 해산했을 때 존 레논은 이렇게 자기비판의 고백을 뱉았다. "꿈은 끝났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니겠지요. 그저 제 나이가 서른이 되었다는 것, 주변에 머리 긴 사람이 이제 많지 않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우상으로서의 비틀즈의 숨결은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록큰롤과 리듬 앤 블루스의 강렬한 비트를 세계음악계에 재인식시켰으며, 그로써 젊은이들의 정서와 의식에 활기를 주었고, 동시에 기존 사회제도와 정치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문화 속으로 끌어들였다. 때문에 거친 면과 부드러운 면을 동시에 응축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강렬한 조화와 아이디어가 빛을 발하고 있는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함께 있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