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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헌회장의 비보를 듣고…[도올 김용옥기자]


BY 하늘지기 2003-08-04

[문화일보 : 도올 김용옥기자 현장속으로]


天喪予! 하늘이 버리셨도다!

▲ 지난 5월 30일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특검에 출두한 고 정몽헌 회장.


“희(噫) 천상여(天喪予)! 천상여(天喪予)!” 공자는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었던 사람, 안회(顔回)가 죽었을 때, 이렇게 외치었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나는 엊그제 잉카제국의 고도, 페루의 꾸스꼬(Cusco)로부터 돌아와 오늘 아침 새벽까지 두주일의 여로에서 느낀 엄청난 문명의 단상들을 정리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새벽 7시 나에겐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정몽헌회장 투신자살.” 아니! 어쩌면 그럴 수가! 그토록 낙천적이었고, 그토록 낙관적이었던 그가 어쩌면 순간의 충동을 견디지 못해, 그렇게 영원한 절망의 늪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다니.

나는 갑자기 얼이빠진 사람이 되어 계동 현대사옥으로 달려갔다. 경찰들이 줄을 쳐놓고 현장접근을 막았지만 나는 곧 김윤규사장과 눈이 마주쳐 서로 눈물을 쏟으며 정회장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내가 일전에 올라가 본 그의 사무실은 비원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동쪽 창을 면하고 있었는데 그가 투신한 창문은 12층 북쪽 코너였다. 그의 몸은 북쪽 주차장 코너에 1m 남짓하게 나와있는 화단위에 누워있었고 그위에 흰천이 덮여있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그의 구두신은 왼발이 흰천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의 시신 위에 있는 소나무의 가지들이 찢겨져 있는 것을 보아 바로 그 자리에서 정회장은 영면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많은 이 세상과 스스로 결별한 것이다. 니힐적인 순간순간에 몸을 던지고 사는 나 도올에겐 그의 결단이 부럽게까지도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그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때리고 울고 싶은 심정만 왈칵 솟구쳤다. 결국 인생이 순간이라면 왜 조금 더 참고 보는 순간의 선택은 할 수 없었냐고! 무기력한 니힐리스트만 양산하는 사회의 모습이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현주소라면 도대체 우리 삶의 희망은 어디 있을까?

“오죽하면, 오죽하면 저 모습이 되셨겠냐구! 검찰의 짓궂은 취조에 너무도 견디기 어려우셨던거야! 해도해도 너무했던거야.” 가장 정회장을 가까이 모셨던 현대아산의 김윤규사장님이 날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목소리였다. 검찰의 취조가 그렇게도 괴로웠을까?

나는 그순간, 공자의 절규를 기억했다. 천상여! 천상여!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정몽헌회장의 일생은 그의 형제중에서도 아버지의 유훈을 이을려고 노력한 이념적인 삶이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장사꾼의 논리를 거부하면서까지 남북화해라고 하는 내일의 이념적 성취를 위해 도덕적으로 살아볼려고 발버둥친 인생이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북간의 경제적 교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치적 화합을 달성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시신앞에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정회장님! 당신은 정녕코 대북사업의 희망을 꺾으셨나이까? 금강산사업의 재개와 개성공단의 착공, 그리고 평양정주영체육관의 완공을 눈앞에 둔 지금, 검찰에 불려 다니는 번거로움을 이겨낼 만큼의 비젼과 희망이 안보이셨나이까? 그토록 힘드셨나이까?”

그의 유서에도 그의 죽음의 결단의 동기를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어리석음’만을 개탄하고 있을 뿐이다. 정몽헌, 그는 정말 그토록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을 저버릴 만큼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에게 일말의 희망도 허락하질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말한다: “하늘이 우리를 버리셨도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셨도다!”

나는 요번 남미대륙을 여행하면서, 국제사회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체성이란 결국 몇몇의 대기업이 만들어 가는 것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확인했다.

코리아는 몰라도, 현대나, 삼성이나, 대우나, LG는 안다. 이 기업들의 성취는 이민족들의 삶의 현장에 깊게 침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의 전위대는 위정자가 아니요, 바로 기업을 일으키고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평가가 너무도 박약한 것이다. 사농공상의 착각적인 위계질서가 아직도 살아있어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현실적 성과에 대한 가치적 존중이 너무도 인색한 것이다.

정몽헌의 죽음은 그의 심약(心弱)을 탄(歎)하기 전에 우리사회의 가치관에 대한 본질적 항거로서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그의 개인적 실존의 후퇴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를 죽음으로 휘몰아 넣은 우리 모두의 실존을 반성해보아야 한다. 기업의 뷰로크라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진취성과 합리성의 점수가 높은 선진적 조직이다. 이러한 조직에 대한 평가가 그보다도 후진적인 정치나 관료의 논리에 의하여 왜곡되고 좌절되는 어리석음이 더이상 반복되서는 안된다. 정치가 더이상 기업의 논리를 지배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금강산에서 처음 그를 만난 나 도올은 금강산에 그의 유해의 재가 뿌려지기를 바라는 그의 유언앞에 호곡할 뿐이로다. 오호, 애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