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우리당 비례대표 탈락한 고은광순씨
“제 손으로 직접 풀려고 했던 문제(호주제 폐지)를 이제 마음 편히 다른 분들께 넘기게 됐습니다. 국회 들어갈 분들 가운데 제게 이거 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앞으로 잘 되지 않겠어요” 지난 7년 동안 하루도 ‘호주제 폐지’ 리본을 가슴에서 떼지 않았던 고은광순씨. 한의사이자 열린우리당 중앙위원으로 이번 17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에 도전했다가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을 부수지 못하고 탈락한 그는, 30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도 여전히 호주제 폐지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고은씨는 순위경선 다음날 자신의 홈페이지 게시판 등에 글을 띄워 “굽은 것을 바로 펴고, 당당한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당에는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지 맞은 것”이라며 오히려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로했다.
여성계·당내부 공천 반발에 오히려 지지자 위로
“호주제 폐지 내손으로 풀고 싶었는데…”아쉬움
“열린우리당이 탄핵정국 이후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개혁 리트머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당내에 원칙과 상식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고은씨가 비례대표 후보명단에서 빠졌다는 소식이 알려진 지난 28일 당 내부에서는 물론 여성계에서 한바탕 요동이 일었다. 유시민 의원 등은 “공정한 후보 선정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반발했다. 여성 정계진출을 활발히 추진했던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등 여성단체들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여성운동가가 누락됐다”며 공천 재조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동안 고은씨의 국회 입성을 위해 뛰었던 여성계 지지자들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각 부문에서 활발히 여성운동을 펼쳐 온 여성계 인사들은 그동안 ‘여성경호본부’라는 모임을 만들어 고은씨를 지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임의 한 지지자는 “고은씨가 호주제 폐지 같은 공익활동에 바빠, 윗사람들 찾아다니며 잘 보이지 못한데다, 몇몇 당내 여성인사들의 견제 심리도 이번 결과에 영향을 끼친 것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다른 여성계 인사는 “호주제 폐지운동 뿐 아니라 부패정치를 청산할 여성후보로 고은씨의 상징성과 기대감이 워낙 컸기 때문에 실망감도 컸다”며 안타까워했다.
고은씨는 비례대표 탈락 뒤 오히려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털어놨다. “주위에 위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나중에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구나 알게 됐습니다.” 이번 총선결과에 대한 예측을 묻자 “국회를 대중의 손에 넘겨줘야 한다”는 대답을 던졌다.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촛불집회에서 이미 보여준 것 아닌가요 지금까지 국회의 칼자루를 쥐고 있던 수구·보수세력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합니다. 또 민주노동당 같은 진보정당이 야당이 되어서 공조와 견제의 관계를 맺어가길 기대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는 “일단 생업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며 오랜만에 여유있는 웃음을 보였다. “그동안 몇 달 내가 운영하는 한의원을 돌보지 못해 적자도 많이 늘었고, 무엇보다 환자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그렇다면 호주제 폐지 운동은 “올해 안에 끝날 것으로 확신합니다. 국민들이 지지하고 있고, 새로운 국회에서도 적극 받아들여질 것으로 믿습니다.”
그는 호주제 폐지가 마무리된 뒤에는 우리 사회의 또다른 가부장제 철폐와 교육개혁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고은씨는 현재 ‘함께하는교육 시민모임’의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또 총선뒤에는 ‘한여성 한정당 지지하기’ 운동을 벌여 여성들의 정치세력화에도 관심을 보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사회를 위해 내가 나서야 할 분야에서 계속 싸워 나갈 생각입니다.” 한때 정치계에 발을 담갔던 고은씨가 다시 재야 여성 활동가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글 김성재 기자 seong68@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