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태해진 나의 행동을 다시 돌아봅니다.
높은 자리에 계셨던 그분도 나라의 가난을 외면 못하셨나봅니다.
그분의 알뜰함에 눈물이 날정도로 지난날의 나의 어린시절을 돌아봅니다.
그러던 제가 요즘 너무 단돈 백원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생겼나봅니다.
저의 그런 행동을 일깨워준 이 글에 감사들 드리며 요즘 경제가 어려운데 이럴때일수록
집안의 주부들이 나서서 근검절약을 보여야 할것 같아 올립니다.
[ 육영수여사의 일화]
육 여사의 결벽으로 인한 감사패 소동 육 여사를 알게 된 것은1968년경이었지만 내가 청와대 비서로 발탁되어 일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71년 9월이었다.
첫 출근을 한 다음날 느닷없이 김정렴 비서실장이 비서실 전 직원에게 보내는 지시 공문을 받았다. 내용은 비서실 직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청와대 문구류나 기타 용품 등을 절대로 사적으로 쓰거나 집에 가져가지 말라는 지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육 여사가 첫 출근한 나에게 주고 싶은 주의사항이었지만 혹 내 자존심이라도 건드릴까봐 김 실장을 통해 전 직원에게 알리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 어느 날 배문 중학에 다니던 지만군이 종이 몇 장을 달라고 해 무심코 내 책상 위에 있던 갱지를 30여장 집어 주었다. 지만군이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다가 육여사 와 마주쳤다. 육여사는 그 종이를 되받아 나에게 돌려주며 나와 지만군을 함께 나무 랐다. 사무실 용품을 대통령가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집어다 써도 안 되지만 더구나 갱지를 연습 장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파기하는 서류 가운데서 한쪽만 인쇄된 종이를 모아 연습장으로 묶어 아들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 내외분의 근검절약 정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 분은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을 아껴쓰는 철저한 수범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에 침실에 있는 변기 물통 에서 물을 아껴쓰기 위해 넣어둔 두 개의 벽돌을 발견하고는 그 방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내가 1975년 10월 부속실을 떠나 공보비서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 대통령이 그 동안 수고했다는 뜻으로 나에게 약간의 위로금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1975년 10월22일 박정희' 라고 자필로 쓴 메모지를 봉투에 함께 넣어 주었다.
그런데 그 메모지 우측 상단 에는 '1974년 월 일' 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74년에 쓰다 남은 메모용지를 버리지 않고 75년10월에도 계속 썼던 것이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육 여사가 새옷을 입으면 많은 여성들에게 같은 옷감이라도 더 고급스러워 보이거나 외국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를 방문하는 여성 가운데는 간혹 육 여사에게 옷감 제조 회사를 묻거나 심지어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서 옷감을 만져 보는 여성들도 있었다. 육 여사는 천성적으로 결벽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이라도 꺼림직하거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밝히고 넘어가는 성미였다.
1970년 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식 때의 일이었다.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장과 어린이 대표들이 초청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어린이 회관 건축에 협조한 20여 명에게 육 여사가 직접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던 내가 감사패 문안을 읽고 육영재단 상임이사 였던 정모 씨가 감사패를 육여사에게 넘겨 줬다. 그런데 감사패를 잘못 집어서 받을 사람과 상패의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그냥 전달 했으면 식이 끝나고 나서 서로 바꾸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육여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르다고 정 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황한 정 이사가 이것저것 감사패를 찾느라 마구 건드려 놓는 바람에 계속 감사패 이름과 사람이 틀려 나갔고 차곡차곡 쌓아든 감사패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식장안에 있던 어 린이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KBS-TV가 그 행사를 중계했으니 개관 첫 날 어린이 회관은 크 게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