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고 하는 것은 서로 교통이 되는 것이다. 교통이란 서로를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몸과 교통이 되는 것은 우리 몸 안에서 소화가 잘 된다. 그러나 나의 체질과 교통이 되지 않는 음식을 섭취하면 배탈이 나고 말 것이다. 나의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면 내 속은 뒤틀린다. 이로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 말을 들으면 지루하다는 것은 소화가 되지 않고 교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과 영이 다르면 교통이 되지 않고 그와 함께 있는 그 자체로 고통이 될 뿐이다. 교통이 되지 않는 것은 서로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 자존심을 내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명을 요구한다. 서로 필요로 하고 서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다.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무엇을 공급받지만 결국 우리가 주님께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 된다. 누가 나의 말을 들어주면 그가 나의 말을 듣고 양식을 삼아 사는 것 같지만 말하는 내가 거꾸로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는 자와 말을 듣는 자는 하나이며 서로 교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교통이 되지 않는다면 잠시도 함께 살기가 힘이 든다.
생명의 교통은 말뿐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다. 한 영이라면 서로가 말하고 요구하지 않더라도 그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요구를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고 준비하신다. 내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미리 다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한 생명이 답인 것이다. 그러나 한 생명이 아니라면 답을 말해 주어도 그 답이 답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다른 답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의문과 의심은 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처럼 답답한 노릇도 없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르고 입이 닳도록 말을 해도 부탁을 해도 접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생명이 아니라면 답을 말해 줄 수 없다. 그러나 한 생명이라면 답을 말할 필요도 없다.
교통이 되지 않는 자에게 어떤 답을 말해 주어도 그 답이 아니다. 답은 오직 한 생명으로 교통이 되는 것이다. 생명이 교류가 되면 의심이 없고 의문도 없고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아멘' 할 것이며 '예' 할 뿐이다. '아니요' 가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예'만 되고 '아니요'가 없다. 모든 의심은 생명의 교통이 끊김에서 나오는 것이다. 교통이 되지 않으면 원망과 불평이 나오고 온갖 부정된 생각이 밀려올 것이다. 그러나 서로 생명의 교통이 되면 오직 믿음이다. 믿음은 곧 생명의 교통에서 나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다 생명 안에 있는 것들이다. 죽은 자에게는 믿음이 아닌 의심이 소망이 아닌 절망이 사랑이 아닌 미움이 가득할 것이다.
자기를 진짜 아는 자에게는 궁금증이 없다. 그래서 아멘하고 예하는 것이다. 거기는 오직 긍정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질문하지 않고 그래서 답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답으로 여길 뿐이다. 자기를 아는 자가 답이다. 자기를 아는 자 앞에서 다른 답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가 그렇다. 그 아는 자체로 답이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답이 된 관계가 결혼 관계인 것이다. 온전한 결혼은 다 아는 것이며 거기는 의문도 궁금증도 없다. 다만 충만할 뿐이다. 거기서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답을 요구하는 자는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답이 아닐 것이며 참 만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는 자기의 원하는 답이 자기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끝없는 질문이었다. 자기 물음이 끝나지 않고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그분이 답이 아니다. 그는 주님에게 묻기를 "내가 맞지요. 내 생각이 옳지요. 내 의견이 틀림이 없지요?" 라고 할 것이다. 이는 다 자기를 주장하는 말뿐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앞으로 여전히 할 인생들의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