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배심원 여러분, 우리 검찰이 피고인을 기소한 것은 무고한 시민을 맹목적으로 벌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대낮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혀 마땅한 책임을 묻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해되었습니다.”(검사)
“이 법정에서 더 큰 비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검찰의 부당한 의심으로 한 젊은이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범인은 처벌돼야 마땅하지만 반드시 진범이어야 합니다. 본 변호인, 죽은 사람을 불러서라도 진실을 밝히고 싶습니다.”(변호인)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배심·참심제의 모의재판이 우리 사법사상 처음으로 열렸다.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대법정에서 열린 모의재판은 미국식 배심제와 독일제 참심제 도입이 타당한 지 점검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날 오전 배심재판에서 배심원에게 쥐어진 사건은 강도살인 사건.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혐의다. 지난 5월 서울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서 김미자(45·여)씨가 흉기에 찔려 숨졌다.
강도살해범은 김씨가 가지고 있던 현금 200만원과 금목걸이를 훔쳐 달아났다. 경찰은 근처에 사는 조무혁(28)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검찰은 그가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이 안 돼 카드빚에 몰리자 범행을 저질렀다고 기소했다.
재판 시작부터 검찰과 변호인은 14명의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었다. 먼저 검찰이 유력한 증인이라며 목격자를 불렀다. 그는 다름 아닌 사건 현장에 있었던 김씨의 딸 김경숙씨.
검사는 “현장에서 범인 얼굴을 똑똑히 봤지요. 그 사람이 이 법정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김씨의 딸은 ‘바로 저 사람’이라며 조씨를 가리켰다. 순간 배심원석이 술렁였다. 기회를 놓칠세라 검사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했다. 김씨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됐던 범인의 몽타주와 조씨의 얼굴 사진이 스크린에 비춰졌다. 언뜻 보기에도 비슷했다.
변호인도 지지 않았다. 법정 스크린에는 목격자가 경찰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가 흘러 나왔다. 화면에서 김씨의 딸은 반대편에서는 볼 수 없는 유리벽을 두고 6명의 용의자를 마주했다. 김씨는 “글쎄 1번인지 5번인지 잘 모르겠네요”라고 고개를 가우뚱했고, 경찰관은 “자세히 보세요”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1번인 것 같아요. 맞나요”라고 김씨가 입을 떼기 무섭게 경찰관은 “맞습니다. 잘했어요”라며 자신이 잡아들인 용의자의 사진을 들이댔다.
분위기를 장악했다고 판단한 변호인은 “저렇게 헷갈려 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피고인이 범인이라고 단정하는 이유는 뭡니까. 어머니를 살해한 사람을 어떻게든 잡고 싶어서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심원들은 다시 알 수 없다는 얼굴이 됐다.
이후에도 검찰은 범인이 입은 것과 같은 색깔의 추리닝복이 조씨의 집에서 세탁이 된 채 발견된 점을 물고 늘어졌고, 이에 대해 변호사는 그런 옷은 흔하디 흔한 것이며 오히려 유리벽 범인지목 과정에 수사 경찰이 동행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3시간에 걸친 공방이 끝나고 배심원은 만장일치의 평결을 하기 위해 평의실로 들어갔다.
이날 모의 재판은 실제 사건을 기초로 많은 부분 재구성됐으며, 이 사건에 대해 하급심에서 유무죄가 엇갈리다가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한 판사는 “이 경우 직접 증거가 없고 범인이 동종 전과가 없는 점에서 유죄로 의심하기는 힘든 것으로 보인다”며 “현행 재판제도에서라면 무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심정에 이끌린 배심원들이 유죄 판결을 한다면 이를 근거로 배심제도에 회의론이 제기될 가능성도 없지않다”고 말했다.

◆배심제=일반인이 배심원단이 돼 법관과 독립해 유무죄만을 판단한다. 판사는 증거채택 여부 등 재판 과정을 조정하고 배심원의 결정에 구속돼 형량만을 정한다. 법률 문제가 아닌 배심원이 인정한 사실에 대해서는 상소가 불가능하다. 상식에 기초한 판단으로 일반인이 쉽게 동의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언론이나 여론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단점이다.
◆참심제=일반인이 참심원으로서 법관과 함께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법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사실문제와 법률문제를 모두 판단한다. 국민이 법관을 견제하고 일반인이 저지르기 쉬운 정서적 오판도 막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하지만 법관과 일반시민이 대등하게 참여하기 어려우며, 둘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큰 어려움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