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요 엄마가 둘이거든요
내가 두 살때 할머니의 호된 시집살이를 견딜 수가 없어서 아버지랑
헤어졌대요
아버지는 '엄마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 다시 만나서 살자' 하셨다더군요
그 할머니는 내가 얘를 셋이나 낳고도 한참을 더 사시다 돌아가셨어요
나를 낳아 주신 엄마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을 데리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살다가 제주도로 들어가서 재혼을 했더군요
재혼하고서도 고생이 말이 아니었나봐요
지금은 귤 농사 지으며 그런대로 사시거든요
결혼하고 혼인 신고하려고 호적 초본을 떼어 본 남편은 단번에 알아보더라고요 난 남편 앞에서 정말 서럽게 울었어요
어느 누구에게도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거든요
동생들조차도 모르는 사실이거든요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서도 난 부모님 중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날 버리고 간 엄마조차도...
그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겎거니 했어요 엄마가 나한테 좀 모질게 군건 사실이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엄마가 이해가 되거든요.
어쨌든 난 정말 착한 아이로 자랐어요 집안 일도 아주 잘 하고 공부도 잘하고 또 동생들도 정말 잘 돌보는 착하디 착한 아이로 말이예요
어찌보면 나쁜 아이로 자랄 수도 있었지만 그때 마다 알 수 없는 오기같은 게 생겼어요
남들은 나같은 순둥이는 없다고 하지만 난 알아요
나보다 더 독하고 못된 사람은 없다는 것을요
아버지는 날 고생하며 자랐다고 시집이나마 잘 가길 바라셨어요
그래서 없는 살림에 대학까지 보내셨고요
덕분에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 만나 아이를 셋이나 낳고 사모님 소리
들으며 살아요
그런데요 난 마음이 아주 슬프답니다.
남편이 나의 호적 초본을 보던 날 서럽게 우는 나에게 약속을 했어요
날 낳아준 생모를 찾아 주겠노라고...
내가 서럽게 운 건 엄마가 보고파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냥 내가 살아 온 인생이 불쌍하게 여겨져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남편은 약속대로 4년 전에 엄마를 찾아 줬어요
자동차 딜러를 하는 남편에게 외삼촌이 차를 사러 왔던거예요
난 외삼촌의 이름을 어찌어찌하여 알고 있었고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남편이 손님 집으로 찾아가서 확인을 해 본 결과 외삼촌이었어요
아주 가까운 곳에서 20년 넘게 살아왔더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를 찾은 일을 난 지금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딸네 집에와서 하룻밤도 편히 자고 갈 수가 없잖아요
언제 동생들이 올지도 모르고 아버지도 들르시고 하시니 ...
친정이 10분거리에 있거든요
그런데도 엄마는 손주들도 보고싶고 또 엄마가 재혼해서 낳은 동생들이 여간 살갑게 구는게 아니예요
나는 이래저래 죄인이 된 심정이예요
키워준 엄마한테 제일 죄스러워서 처음엔 친정에도 갈 수가 없었어요
동생들한테도 면목이 없고 또 내 아이들한테도 혼란스러움을 주는 것 같아서 제주도 엄마를 자꾸 멀리하게 되더라고요
전화도 잘 안하게 되고 먼저 전화가 걸려와도 건성으로 받게 되고 난 어쩌면 좋아요?
얼마전에 제주도에서 외할아버지 제사땜에 왔었어요
아이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난 끝내 보여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친정에 갔을 때 혹시라도 말실수라도 할 지 모르니 엄마는 그냥 나 하나 보는 걸로 만족하며 살아 달라고 했어요
나 정말 못됐죠?
야속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어요
난 지금의 내 생활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거든요
한편으로는 겁도 나요
엄마가 갑자기 아파서 돌아가시면 어쩌나, 아직 내 친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못 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제 마음 아시겠어요
내가 이렇게 못된 사람이란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우리 친정 엄마는 세월탓인지 아니면 어느새 늙어 버렸는지 나를 많이 의지해요
키울 때는 좀 모질게 키웠지만 참고 산 세월 덕인지 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 있어요
나를 키워 준 엄마의 동생들, 그러니까 외삼촌이나 이모들 외숙모들도 모두들 나를 정말 이뻐해 주세요
이런 상황인데 내가 어떻게 다른 마음을 먹을 수가 있겠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동생들한테는 말 할 수 있을려나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