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만리에서
인터넷으로 축구 경기를 보았습니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 중계를 시작하는 이곳 시각 5시까지
두 시간을 버틴 끝에 본 경기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월드컵이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히딩크의 가장 큰 업적이 '신화를 붕괴시킨 것'
이라고 봅니다...
기억하시나요?
94년 미국 월드컵...
우리는 독일의 지금 감독인 클린스만이 인정할 정도로
잘 싸웠지만,
초반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아쉽게 조별예선에서 탈락했습니다...
한국 축구의 문제는 사실 지난 30년, 아니 그 이전부터 늘
한결 같았다고 볼 수 있지요...
단골로 나오는 1번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질인
이른바 '문전 처리 미숙'입니다...
약팀에는 수없이 많은 기회를 얻고도 번번히 '골문 앞에서 닭짓'
하는 풍토 때문에 늘 고전했고,
강팀에는 어쩌다 한번 오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니
늘 힘겨울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그 동안 이 숙제를 풀기 위해 한국 축구가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사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이 문제를 풀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오늘 3골을 넣기는 했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더욱 완연해 질 거라고 보지요...
그 이유는 '왜 우리의 문전 처리는 늘 미숙한가'라는 질문에서
찾아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보았고,
저는 월드컵이 이 답을 빨리 가져다 준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원인은 바로 '축구를 맨 땅에서 해 온' 한국식
축구 환경이었습니다.
월드컵 이전만 해도, 고교 축구, 심지어 실업 축구까지
결승에 올라야만 겨우 잔디 구장에서 공을 찰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잔디에서 공을 차는 것과 맨땅은 천지 차이였지요.
결국 공을 차는 걸 배울 때부터 몸에 기억되어 있는 맨땅의 기억이
늘 한국 축구의 발목을 잡아 왔던 거라고 저는 봤습니다.
월드컵은 이 숙제 하나는 웬간히 해결해 주었지요...
전국에 '월드컵을 치를 수준'의 경기장 10개가 세워졌고,
이 인프라는 이제 적어도 '1년에 잔디구장 밟는 게 소원'인
축구 선수들의 '소원같지 않은 소원'을 해소하는데는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관리비가 많이 들지만...
어쨌든 이런 인프라 덕분에 우리 선수들의 문전 처리 미숙은
날이 갈수록 개선되리라고 확신하고 있지요...
월드컵 구장은 우리가 지은 거니까, 이는 '히딩크'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히딩크가 무너뜨린 신화라고 했던 건 무엇일까요?
축구 팬들이시라면 짐작하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월드컵이 가져 다 준, 아니 오히려 그 보다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히딩크가 가져다 준 '선물'은 바로
'강한 팀에 주눅들지 않기'입니다...
한일 월드컵 이전만 해도 한국은 늘 우물 안의 개구리였지요...
아시아권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월드컵을 비롯한 세계 무대만 나가면 판판히 박살이 나곤
했습니다...
아시아 축구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저도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아시아 축구 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아는데는
역시 사우디를 비롯한 다른 아시아권 국가의 활약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월드컵에 가장 많이 나간 나라가 되었지만,
그리고 한일 월드컵 덕분에 아시아에서 월드컵 성적이 가장
좋은 나라가 되었지만,
그 이전만 하더라도 아시아에서 월드컵 성적이 좋았던 나라는
사우디였습니다.
사우디는 이미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적이 있었고,
사실 그 이전에 북한도 8강에 오른 적이 있었지요...
우리만 1승도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우물안 개구리 체질'을 극복하지 못한 탓이었지요..
한국 축구는 월드컵 이전만 해도,
강팀들을 만나면 늘 '실력발휘'를 못해보고 초장에 발이 얼어붙어서
'어이없는 실점'들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 중반이 넘어가면 어느 정도 이런 '얼어붙는 증상'이
없어지면서 대등하다고까지는 못해도 상당히 악착같이 따라붙는
양상들을 마치 '도돌이표'처럼 되풀이 해 왔지요...
과거 멕시코 월드컵의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 전이 그러했고,
미국 월드컵의 독일과 스페인전도 그러했으며,
프랑스 월드컵의 네덜란드전도 성격은 다르지만 비슷했습니다...
우리가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를 이길 수 있는 전력은 아니라해도,
웬지 지고 나서 아쉬웠던 그런 경기는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전력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지요...
이런 확신이 맞다는 걸 증명해준 사람이 '히딩크'였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우리 실력이 부족하다'는 약점 대신,
'우리가 체력을 키워야 한다'는 당위를 밀고 나간 사람입니다...
그리고는 이전 감독과는 반대로
'강팀과 부딪히는 걸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을
밀고 나갔습니다...
그 결과는 초기의 '오대영'이라는 조롱섞인 별명을 얻을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프랑스에 오대영, 체코에 오대영...
하지만, 히딩크는 '신화'를 무너 뜨렸습니다...
그렇게 깨지고 나서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깨질 팀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선수들이
갖게 된 것이지요...
깨질까봐 걱정스러워서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한일월드컵에서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꺽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니, 아예 그런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1승은 어떻게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월드컵까지 마치고 나니까,
역시 한국 축구는 이렇게 달라졌더군요...
독일을 만나도, 주눅이 들어서 일단 내지르고 보는 식의 축구는
많이 사라진 걸 오늘 전반전부터 쭉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전력은 쳐지지만 이길 수도 있는 축구라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지요...
역시 중요한 건 있는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고,
투지를 보이는 것이고,
기회가 생겼을 때 과감히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강팀이라고 주눅 들고,
깨지기 싫어서 역습도 안하고,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투지를 잃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보여 준 거지요...
신화는 이렇게 깨집니다...
통행금지가 없으면 전국의 밤이 빨갱이 천지가 되고,
무법천지가 되고, 간첩들이 활개칠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 생기고,
아예 밤에만 영업하는 의류센터도 생기고,
밤을 낮처럼 지새우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들의 귀한 자원인
시간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국보법도 신화일 뿐입니다...
이게 두려워서, 반동이 두려워서 움추리면,
우리는 또 우물안 개구리 신세입니다...
자그마한데 놀라고,
누가 나를 간첩이라고 말하면, 내가 간첩이 아닌데도 두렵고,
겁나고,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그 신화일 뿐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마치 히딩크가 강팀들과 평가전을 치를 때,
'선수들 기죽게 해서 좋을 일 뭐 있느냐'며 두려워했던 '전문가'라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히딩크는 '신화'보다는 '현실'과 '도전'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성공했습니다...
우리도 이제 한국축구처럼 '신화'를 깨어야 합니다...
'강팀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상대'가 아니라,
'우리도 강팀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축구'라는 걸 깨닫는데
그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우리가 해 냈었던 것처럼
'보안법'은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보안법이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 자유를 억압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괴물임을 깨닫고
이 신화를 정면돌파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년 연말에는
'보안법 없어져도 대한민국은 멀쩡하네'라는 생각을
우리 국민들이 갖도록 만들어야지요...
그래야 우리도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웬지 모르게 주눅드는'
이런 꼴을 벗어날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