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의사의 죽음 | ||||||||||||||||||||||||||||||||||||
[오마이뉴스 2004-07-14 00:09] | ||||||||||||||||||||||||||||||||||||
'한의사 선생님이 돌아가셨대.'
그 짧은 문자는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모습이 잘 안 떠오른다. 눈물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흐르고 내 마음 한 구석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하다.
이상호 선생님은 한국국제협력단(KOICA) 소속 한의사로 북동부지역 트링코말리에서 의료봉사를 하시던 중 지난 7월 8일 목요일 새벽 갑자기 세상을 등지셨다.
같이 간 단원 말에 의하면 밤까지 잘 계시던 분이 아침에 식사를 하러 나오지 않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어 8시 쯤 숙소문을 열고 들어가니 벌써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사인은 과로사인 듯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계시던 트링코말리는 스리랑카 반군장악지역으로 최근 정부와 휴전협정을 맺어 일시적으로 평화를 찾은 곳이다. 선생님은 이전에 콜롬보 일원에서 일하시다가 반군장악지역의 의료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콤스타(대한한방의료봉사단)과 함께 이 지역을 찾아 현지인에게 무료의료봉사를 해오시던 중이었다.
선생님과 함께 한 단원 말에 따르면 의료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선생님은 하루에 수많은 환자를 돌보기도 하셨기에 과로로 쓰러지신 것 같다고 한다.
이상호 선생님은 한의학에서는 최고라는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2001년 11월 콤스타 단원의 일원으로 스리랑카에 첫 발을 디뎠다. 1주일간 봉사활동을 한 후 귀국한 뒤로도 선생님은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갈 생각을 하셨다. 그러나 스리랑카 현지 사정이 나빠 스리랑카 정부가 허가를 미루는 바람에 2년이 지난 2003년 4월에야 다시 스리랑카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 주민들의 한 달 평균 월급은 우리나라 돈으로 약 6만원. 도저히 이 돈으로는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현지인들은 늘 그 병원을 이용한다. 선생님은 "가난한 자가 가장 서러울 때는 제때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할 때"라며 정성껏 환자를 돌보셨다.
또 현지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전통 한의학을 전파하기 위해 현지 의사들에게 직접 강의도 하셨다. 한의학의 특성상 구하기 힘든 약재들도 많았으나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용케 충당하셨다.
"마게 까꿀러 히리웨띨라 사하 카두에니어봐 와게.(다리가 무척 쑤십니다)" (중략) "이꾸망터 수워웨느(빨리 나으세요)" "보우머 이쓰뚜띠(고맙습니다)" 이런 대화가 늘 이어졌다.
고온 다습하고 탁한 공기 때문에 스리랑카는 천식 등 호흡기 질환과 요통 환자가 많다. 30~35도를 넘드나는 무더위 속에 진료를 한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다. 전력 사정도 좋지 못해 수시로 정전이 된다.
열악한 스리랑카 정부 재정으로는 소독용 솜도, 기자재도 지원받기 어렵다. 하지만 그 열악한 생활 속에서도 선생님은 항상 웃으시며 환자들을 만났다. 스리랑카 내에는 영리 목적으로 와 있는 인도 의사 외에는 의료봉사활동을 위해 스리랑카에 정착한 외국인 의사는 없다. 선생님은 외로운 싸움을 하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선생님께 물어봤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내가 스리랑카에 왔을 때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를 내가 다시 그 분에게 물어 보았다. 근데 답이 다소 엉뚱했다.
"한국이 재미없어서."
선생님은 단지 봉사에 머무르지 않고 스리랑카에서 현지인과 함께 살 계획을 세우셨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그런 선생님의 사랑을 현지인들도 잘 알았다. 선생님 진료실에서 만난 환자이자 현지인 의사는 "마터 고닥 싼토싸이"라고 내게 말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나에게 선생님은 행복을 주었다. 그로 인해 행복이 왔다"정도로 표현된다. 그런 말들로 그들은 선생님께 감사함을 표현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은 서둘러 뭔가 이룩하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분이셨다. 언젠가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선택한 것은 봉사가 아니야. 그냥 삶이야. 나를 낮추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 질 수 있어."
오늘(10일) 선생님의 시신이 고국으로 돌아온다. 채 10살도 안 된 아들과 5살 난 딸아이를 두고 싸늘한 시신으로 고국으로 돌아오는 선생님. 그 가족들이 울어야 하는 수많은 밤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선생님, 선생님의 고귀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윤식 기자 (jinju95@jinju.or.kr)
덧붙이는 글 이상호 선생님의 발자취를 느끼시려면 스리랑카 한국 해외봉사단 사이트를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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