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은 1957년에 사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 단위의 수난과 상처를 더듬어 볼 때 나는 자꾸 좀더 먼 과거, 한 세기 전으로 올라갈 필요를 느끼고는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보게 되는 것은 영상으로 기록된 재난들이다.
(중략)나는 이 지점에서 최민식을 만나게 된다. 유럽인이 만든 작은 사진기에 미국 이스트만 코닥사의 흑백 필름을 넣어 들고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조국을 찍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작가의 모습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사진기라는 도구를 들어 눈에 댔을 때, 그의 망막을 아프게 찌른 것은 상처 입은 동족의 슬픈 얼굴이었다. 민족주의는 박살이 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통과 억압이 아주 넓게 퍼져 있는 땅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희생자들이 직면한 악몽과 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재난 겹쳐지는 땅의 제2세대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열강의 첫 모습을 기억하는 제 1세대는 장기간 계속된 식민 치하에서도 내내 언어에만 매달려 있었다. 누구나 보기만 하면 알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서의 사진을 그들을 잘 몰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