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No.1
그 놈은 한 눈에 척 보아도 순진한 놈이었다.
대충 쓸어 넘긴 더벅머리, 헐렁한 갈색 남방에 낡은 청바지, 잘 생긴 것도 못 생긴 것도 아닌...... 그냥 생긴 얼굴. 중간 키에 왜소한 체격.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냥 행인3 같은 놈이었다.
외모 갖고 사람 무시하면 안되지만, 아무리 봐도 나중에 장가가면 밤일이 시원치 않다고 마누라한테 구박 받고서 혼자 베개 들고 소파에서 찌그러질 위인 같았다.
그런데 이 친구가 강간치상범이랍시고 형사계 의자에 고개 푹 숙이고 앉아 있으니 캐스팅이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이 인간이 더듬거리며 풀어 놓은 스토리는 이렇다.
지방의 그저 그런 대학 1학년생인 오늘의 주인공. 어느 날 친구 1명과 술을 먹고 나이트에 가게 된다. 이름하여 '코파-카바나'. 스테이지에서 놀다가 꼬신건지 꼬인건지 하여간 잘 노는 여자 2명과 합석을 하게 되고........ 발바닥에 촉촉히 땀이 배일 즈음 포장마차로 옮겨 오뎅국물에 소주 몇병을 작살낸 다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쌍쌍이 팔짱끼고 보무도 당당히 부근 여관으로 들어갔댄다.
방을 2개 잡아 놓고, 한 방에 모여 앉아 캔맥주 마셔가며 고스톱을 치고 있었는데, 마침 자기 파트너가 전화를 한다며 밖으로 나가더랜다. 이제나 저제나 본게임을 기다리던 우리의 주인공, "옳지, 이게 신호구나" 싶어 슬그머니 따라 나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 가더랜다.
따라 들어가서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려 무드 있게 포옹을 하는데, 그녀가 반항을 하더란다. 순간 당황했지만 식순에 의한 의례적인 튕김으로 생각하고 그녀를 침대 위에 눕히면서 올라 탔는데, 그녀가 "병신같은 새끼, 지랄하고 있네"라고 말하면서 확 밀치더란다.
욕정과 쪽팔림이 뒤섞인 복잡한 정신상태에서 그만 그녀의 뺨을 2대 때렸는데...... 그 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단다. 그녀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그리고 지금 내 앞에 고개 푹 쳐박고 앉아 있게 되었단다.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키스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쯧쯧. 그녀는 전치 2주의 진단서를 제출하였다. 꼼짝 없이 강간치상범이 되고 말았다.
조사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양측의 진술은 대체로 일치하였고 어쨌거나 강제로 한번 하려던 과정에서 폭력이 있었던 것은 틀림 없고...... 게다가 여자 쪽에서는 합의금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곧바로 고소를 취소하였다.
전과 없음, 주거 일정, 학생 신분, 우발적 범행, 고소 취소 등등으로 보아 구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어 그 놈을 곧바로 석방하였다. "합의금으로 얼마 줬는지는 모르지만, 화대 비싸게 줬다고 생각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는 충고와 함께.....
그리고 이 사건은 내 기억에서 잊혀졌다.
검사실로부터 호출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두어달쯤 후였다. 다소 뚱뚱한 체격의 검사는 까만 안경 너머로 날 쏘아 보면서 닥달하는 것이 마치 죄인 취급하듯 하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나 했더니 그 대학생을 왜 마음대로 석방했느냐는 거였다.
"구속할 사건이 아니라서 석방했는데 뭐 잘못 됐나요?"라고 대답했더니 "강력 범인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석방해야 하는 거 몰라?"라고 호통친다.
자못 심각한 순간이었지만 그 행인3 같은 놈의 꼬락서니에 '강력범인'이라는 말이 오버랩되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근데..씨이... 언제 봤다고 반말이래?'
Scene No.2
사무실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특수부 검사가 과장님을 불렀단다. 검찰의 특수부는 공무원 범죄를 수사하는 곳이다.
여기 저기서 쑥덕쑥덕....걱정걱정.....
약 2시간 후..... 다행히 과장님은 무사히 돌아오셨다.
걱정반 호기심 반으로 과장실 문을 두드렸다.
"다녀 오신 일은..... 어떻게...."
과장님은 담배를 깊숙히 빨아들이시더니, 담배 연기를 다 뱉어 내기도 전에 한 말씀 하셨다.
"내 참 더러워서"
우리 관할에는 온천 휴양지가 있다. 검찰 높은 분이 온천에 가셨는데, 탕 안에서 온 몸이 낙서 한 놈들(용, 호랑이, 장미, 피카츄 등등)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불편한 심기는 특수부장에게까지 전달되었고, 그래서 우리 과장님을 불렀다는 것이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아니요?"
"대책이면....?"
"뭐.... 목욕탕 업주들한테 '문신 있는 사람 출입금지' 푯말이라도 써 붙이게 하던가."
Scene No.3
교도소에서 돈있고 빽있는 놈을 '범털'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경찰서에도 가끔 범털이 조사 받으러 오는 경우가 있다.
A는 범털로 분류될 만한 인물이었다. 빵빵한 재력의 새마을 금고 이사장인 그는 시의원을 지낸 전력도 있었다. 과연 범털 답게 그는 서장실, 과장실을 방문하고서야 조사를 받으러 왔는데 조사를 받으면서도 은연 중에 정치권과의 친분을 과시하려고 애를 썼다.
A를 고소한 사람은 그의 고향 친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던 그는 그 지역이 택지 개발 되면서 보상금으로 6억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 형제들에게 분배하고 남은 3억원을 어떻게 관리할까 궁리하던 중에 마침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있는 친구 A에게 그 문제를 상의하게 되었다.
A는 높은 이자를 주겠으니 자기의 새마을 금고에 예치시키라고 하였고, 친구는 3억원을 몽땅 A에게 주고서 "정기 예탁금 증서"를 받았다. 그후 통장으로 매월 꼬박 꼬박 이자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새마을금고 연합회에서 감사 결과 A의 공금 횡령 사실이 밝혀져 고소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친구는 불안한 나머지 새마을금고에 가서 예탁금의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했다. 3억원이 예탁된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상을 조사하여 보니 A는 세상물정 모르는 친구에게 백지에다가 볼펜으로 "정기예약금 증서"라고 써 준 다음 3억원을 마을금고에 입금시키지 않고 개인적으로 사채 놀이를 하여 매월 친구의 계좌로 이자만 넣어 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3억원을 돌려 주라고 했더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었는데 그 사람이 도망가 버려서 갚아 줄 수 없다고 한다.
친구의 농토를 판 돈 전재산을 꿀꺽하려는 의도가 분명하였다.
"이런 나쁜 놈이 있나?"
즉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 차리지"
그러나 다음날 영장은 기각되었고, A는 뜨거운 맛은 커녕 미지근한 맛도 보지 않았다.
검사가 쓴 기각 취지는 간단 명료했다.
"피의자와 피해자가 친구 사이인 점 참작하여 기각함"
Scene No.4
여자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현장에 가보니 아직 젊은 여자였는데 문틀에 못을 박고 빨래 줄로 목을 매어 숨져 있었다.
의자에 올라가서 목을 맨 듯, 바로 옆에 식탁용 의자가 쓰러져 있었고........
오열하는 가족들에게 전후 사정을 들어보니, 그녀는 시집간 딸이었는데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1달 전부터 친정에 돌아와 있었단다. 한달 내내 외출도 않하고 우울하게 지내더니 가족들이 모두 외출한 사이에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일단 외부인의 침입이나 탈출 흔적은 없었다. 가족들이 돌아왔을 때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열쇠업자를 불러 따고 들어간 것이 확인되었다.
의사의 검시 결과로도 목을 맨 흔적 외에는 아무런 외상이 없었다.
비보를 듣고 친척들이 속속 도착하였고, 가족들은 장례절차를 진행하길 원하였다.
"변사 사건은 검사 지휘를 받아야만 합니다. 검사가 부검을 하라고 하지 않으면 곧바로 장례를 치르실 수 있습니다."
사무실에 돌아와 변사사건 발생 보고서를 만들어서 검찰청에 보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무렵이 되어도 검사의 지휘가 내려오지 않았다. 유족들의 문의는 계속되고 ....
검찰청에 전화를 하였다.
"검사님이 직접 시체를 보신 후에 지휘를 하시겠다고 한다"
검사를 바꿔 달라고 하여 언제쯤 시체를 보러 오실 건지 물었다.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안될 것 같고.... 내일 갈테니까 현장 보존 잘 하고 계시오"
유족들에게 그러한 검사의 뜻을 알렸다. 그러나 유족들은 멀리서 온 친척들도 많은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면서 항의하였다.
다시 검사에게 전화하여 "현장 상황이나 의사의 검안 결과로도 타살 혐의가 없으니 그냥 유족들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검사는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 꼭 와주셔야겠다고 거듭 부탁하였다. 한참을 망설이던 검사는 짜증스런 말투로 "그럼 기다리시오"라고 하였다.
약 1시간 쯤 후에 검사가 도착하였다. 술에 취한 유족들이 검사에게 항의하려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검사는 시체를 한번 흘낏 보더니 "유족에게 인도 하시오"라고 하고는 차를 타고 떠났다.
그제서야 시체는 유족에게 인계되었다.
Scene No.5
저녁 무렵 수배자가 잡혀 왔다.
다방에서 일할테니 선불금 500만원을 달라고 다방 업주를 속여 선불금만 받고 도망갔다는 내용으로 고소장이 제출되었으나 행방을 찾을 수 없어 수배되었던 여자인데 불심검문에 걸려 긴급체포되었다고 한다.
조사를 해보니 선불금 500만원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 다방에서 5개월 가량 일을 하다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업주에게 말하고 다방을 그만 둔 것이었다. 일을 하면서 일부 갚았기 때문에 사실 업주에게 갚아야 할 돈은 300만원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 온 업주는 수배자의 가족으로부터 지불각서를 받고 나서야 수배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서 고소를 취소하였다.
이래서는 범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설령 범죄가 된다고 하더라도 구속할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조사를 마치고 나니 밤11시. 긴급체포된 수배자를 석방하려면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만 한다. 급히 서류를 만들어 검찰청에 찾아갔다.
"긴급체포된 수배자에 대해 석방지휘를 받으러 왔습니다"
"검사님 퇴근 하셨어요."
"당직 검사님 안 계십니까?"
"아...참... 당직 검사님이 퇴근하셨다니까 그러네. 내일 아침에 출근하시면 지휘 하실테니 놓고 가쇼."
사무실에 돌아왔다.
이 여자는 석방 대상이다. 그러나 검사를 지휘를 받지 못하여 석방할 수가 없다.
고민이 되었다.
유치장에 넣고 퇴근하자니 그 여자가 억울할 것 같고,
그냥 집에 보내자니 내 목이 온전하지 않을 것 같고,
결국 나는 그 여자와 그 여자의 가족과 함께 사무실에서 도란 도란 세상사는 이야기 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Scene No.6
돌이켜 보면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벌써 13년 쯤 된 일이다.
형사과에 처음 발령 받은 나는 사실 분위기 파악이 제대로 안된 상태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검찰청인데요"
"예, 안녕하세요"
"000구속영장. 기각된 거....거기 있죠?"
"예, 여기 있어요"
"그것 좀 빨리 갖고 와요"
"왜요?"
"아!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되면 검사님이 재청구 할 지 여부를 검토한 후에 경찰서에 반환해야 하는데 업무 착오로 그냥 갔거든요"
"....... 그럼 이 서류가 경찰서에 온 것은 우리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네요. 그렇죠?"
"그렇죠. 우리가 실수한 거예요"
"그러면 와서 가져가시면 안될까요? 여기 지금 무척 바쁘거든요"
"뭐요?"
난 정말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검찰청에 가는 서류건 오는 서류건 무조건 경찰이 배달해야 한다는 것을.
연세 많으신 우리 과장님이 나 때문에 검찰청에 불려 간 것은 지금도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Scene No.7
경찰은 고소 고발 사건의 수사를 마치면 검찰에 송치하기 전에 검사로부터 '송치전 지휘'를 받아야 한다. 경찰은 수사 결과와 송치의견을 기재한 '지휘건의서'를 작성하여 수사기록과 함께 검찰청으로 보내고, 검사는 거기에다 지휘내용을 기재하여 경찰로 보낸다. 경찰은 검사의 지휘에 따라 최종 송치의견서를 작성하여 송치해야 한다.
경찰의 송치 건의서 : 어쩌고 저쩌고 하여 범죄혐의 없으므로 불기소 의견임.
검사의 지휘 내용 : 이러쿵 저러쿵 하므로 기소의견으로 송치할 것.
그런데 도대체 '의견'이 무슨 뜻이지? 국어사전을 찾아보자.
의견 (意見) : 명사. 어떤 일에 대한 생각(동아 새국어사전, 동아출판사)
경찰은 '어떤 일에 대한 생각' 마저 허용되지 않는 존재인가 보다.
Epilogue
나의 경찰생활 15년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많은 검사와의 만남이 있었다. 분명 이 땅에는 훌륭한 검사가 그렇지 않은 검사보다 훨씬 더 많다.
대개의 검사들은 정의감과 사명감이 강하다. 그리고 하나 같이 명철한 두뇌와 고도의 법률지식을 갖고 있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집단으로 꼽히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국가의 권한 배분에 있어서 특정 집단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서는 곤란하다. 민주주의는 불신의 이념이다. 불신은 견제와 균형을 통한 장치적 정의를 추구한다.
검사들의 명철한 두뇌와 고도의 법률지식을 아끼는 만큼 그것이 진정 국민을 위해 발휘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여야 할 책임은 다름아닌 국민에게 있다.
이 글은 검사의 우수성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쓰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의 경검관계는 분명 왜곡된 것이다.
경찰과 검찰은 상호 긴밀히 협력하면서도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해주는 경쟁적 동반자로서 새로운 자리매김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