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554

** 사랑의 찬가-에디뜨 피아프 **


BY 릴리 2005-09-28

사랑의 찬가-에디뜨 피아프







1915년 12월 19일, 굴곡많은 비련의 삶을 시작하는 에디뜨 삐아프.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파리의 벨베이르 72변가 길 한복판에서 출생신고를 치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무책임함 때문에 독일병사에게 사살된 간호원의 이름을 따 에디뜨란 이름이 붙여졌다. 또, 이탈리아 출신의 3류 가수였던 어머니는 두 달밖에 되지 않은 피덩어리를 두고 도망쳐 버린 건 물론, 떠돌이 서커스단의 곡예사였던 아버지는 아이가 버거워 외할머니 집에 맡겨 버리고 멀리 멀리 떠나 버렸다.



그만큼 인생의 첫 테이프를 끊는 순간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운명이었던 에디뜨 삐아프.

노래를 부르면서 삶을 구걸하던 비참한 어린 시절에서부터 캬바레를 경영하던 루이 르플레

(Louis Leplee)의 눈에 띄어 33년 무대에 서기까지 정말 한 순간도 파란만장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물론 가수로서 화려한 절정기를 구가하던 이후 30년간 역시도 천부적인 노래 솜씨와 열정적인

무대매너로 우리 영혼을 뒤흔들며 언제나 스캔들 한복판에서 염문을 뿌렸지만, 행복은 잠깐씩

스쳐갈 뿐 그녀의 삶은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늘 목말랐다











63년 10월 11일, 그녀의 죽음 소식을 접한 절친한 친구이자 프랑스의 위대한 예술가인 장 꼭또(Jean Cocteau)는

'그녀는 위대했다.삐아프와 같은 여성은 앞으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회환에 젖은 말은 남긴 태 그녀를 따라 저세상으로 떠났을 정도로 전세계로부터 무지막지한 애정공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사랑에 굶주렸던 것은 왜일까?



헤비급 복싱 챔피온인 마르셀 세르당(Maarcil Cerdan)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비롯해

이브 몽땅(Yves Montand), 가수겸 작곡가인 자크 필스(Jacques Pills)는 물론이고,

26살이나 연하인 그리스 청년 테오 사라포(Theo Sarapo)와의 결혼 할 것 없이 나이를 초월한

불타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소진시켰지만, 그 열정만큼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삶 속에서 는 사랑에 울고, 웃고, 아파했던 에디뜨 삐아프. 그만큼 그녀

에게 있어서 음악은 사랑의 찬가이자 곧 실연의 상쳐였던 것이 아닐까?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삶도 음악도 결코 존재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남과 여'의 끌로드 를르슈 감독이 에디뜨 삐아프의 사후 2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 "에디뜨와

마르셀(Edith and Marcel)"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에디뜨 삐아프와 마르셀 세르당의 사랑은

세기를 초월할 정도로 열렬하고 비극적인 것.



에디뜨가 마르셀의 사망소식을 듣고 쓰러져 있을 때 여류 작곡가인 마르그리트 모노

(Marguerite Monnot)에게 준 사랑의 시가 있는데, 바로 그 마르셀을 향한 에디뜨의 한없는

사랑의 시에다 곡을 붙인 것이 다름아닌 <사랑의 찬가(Hymne A L'amour)>이다.

이 곡은 50년 1월 플레이엘 음악당에서 초연돼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곧 전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사랑을 앓는 연인들의 가슴에 그 숭고한 아름다움을 한올한올 새겨 넣게 된다.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에 무너져 내린다. 해도 대지가 허물어질지 모른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라는

<사랑의 찬가>의 한 구절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나 사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쓸쓸함도, 삶의 회한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던 비련의 여가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누구와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최고의 여가수로, 또 간혹 영화배우로 활동

하면서 재능과 열정을 기꺼이 헌사했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1940년에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는 뽈 모리스라는 가수와 알게 되어 2년간 동거했다.

두 사람의 생활상을 듣고 쟝 꼭또(1889∼1963)는 그녀를 위해 1막짜리 희곡 [쌀쌀한 미남자]를

썼다.



삐아프가 꼭또를 알게 된 것은 1939년 악보 출판업자 라울 부르똥 집에서의 일이었다.

그녀의 친구였던 부르똥 부인이 딴전을 부리는 삐아프를 그와 만나도록 주선해 준 것이다.

꼭또는 입을 열자마자 '우리는 두 사람 모두 시(詩)에 소속된 인간이로군요.'하고 말했다.

그것으로 딱딱한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두 사람은 순식간에 '쟝', '에디뜨' 하고 서로 부르는

사이가 되었고, 그들은 평생 굳은 우정으로 맺어졌다.



그 후 1963년 10월 11일 삐아프의 사망 소식을 들은 꼭또는 '그녀는 위대했다.

삐아프와 같은 여성은 이제 두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불과 그 네 시간 뒤에 심장 발작을 일으켜 뒤를 따르듯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