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341

2007년엔 엄마의 멍든마음을 치료해드릴게요,,


BY shhwyl 2006-12-14

2006년 3월 1일.. 드디어 많은 사람들의 축복속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뱃속에 8개월된 우리아가를 품고 말이지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엄마에게 제일 죄송했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 힘든시절 지하단칸방에서 쌍둥이를 키우시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아둥바둥 아끼고 모아서 첨으로 우리집을 마련했을때 너무나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수 없습니다. 첨으로 가져보는 제방과 깨끗한 화장실 그리고 첨보는 4개의 가스렌지.. 그땐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좋았던지.. 엄만 그 후에도 우리 먹고싶은거 입고싶은거 다 해주려고.. 또 다른애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학원에 보내려고.. 먹고살만해진 그때에도 일을하셨죠.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아빠를 하늘나라로 부르시네요 우리 아빠를 벌써 필요로하시네요.. 이제 겨우 먹고살만한데... 나들이도가고 우리 네가족 너무 행복한데... 저희 아빤 지방으로 개인용달을 하셨었습니다. 저녁에 지방에 내려가시면 다담음날 낮에 들어오셨죠.. 톨게이트비가 아까워 국도를 타고다니시며 그 좁은 트럭에서 웅크리며 주무시던 아빠.. 그땐 미쳐몰랐는데 가끔 들리는 고속도록 휴게소에 빼곡히 세워져있는 트럭들을 보면 우리아빠도 저렇게 어두운밤 홀로 주무셨겠구나 얼마나 쓸쓸하셨을까하는 생각을하면 맘이 찢어지게 아파옵니다. 아빠가 돌아가셨던날.. 첨으로 아빠가 꿈속에 나왔습니다.. "따르릉"거리며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자꾸 울려대는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 날 말리는 아빠.. 그리고 그 전화를 받으며 수화기에대고 화를내던 아빠의 모습.. 그땐 그 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무섭게 울리던 전화를.. 자신의 사망소식을 믿을수없는 아빠의 마직막 몸부림이었다는것을..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은 아빠의 절규였다는것을.. 다음날 아침 알게된 아빠의 사망소식.. 그날의 꿈때문이었을까요.. 아침에 전화를 받는 떨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렇게 많은 내용이 오가지도 않은 그 대화에 전 세수하다가 불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별일아닐꺼라는 생각을하며 온 신경을 전화에 쏟아 통화내용을 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신없이 서두르던 엄마..... 역시.. 제가 예상했던것은 적중하고말았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대.."라며 이모에게 울먹이며 말을하던 엄마............................ 그리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지방에 있는 한 병원... 하지만.............. 중환자실에 있다던 아빠는...우리.. 아빠는.... "사망하셨습니다"라는 간호사의 한마디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곳으로.. 아주멀고 먼 나라로 떠나버려습니다. 이젠 보고싶어도 다시는 볼수없는 하늘나라로요... 아빠를 차가운땅에 묻던날..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아빠가 슬퍼서 우는걸까.. 아니면 아빠는 괜찮다고 우리를 다독거려줬던 걸까요?? 지금생각해보면..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그리고 아빠는 괜찮다고 하늘나라 너무 좋다고 다독거려준것 같습니다.. 제 결혼식때도 그날때처럼 흰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그 눈을 맞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에서도 저의 결혼식을 축복해준 아빠.. 이젠 내 기억에서조차 가물가물해져가는 아빠.. 너무 보고싶습니다.. 그 이후 우리가족은 또 휘청댔습니다. 자식보다 아빠에게 더 의지하고 기댔던 엄마.............. 밤마다 안방에서 들리던 흐느낌.. 그때부터 엄마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렵게 모으고 모아 샀던 집마져 잃었습니다. 아빠의 온기가 가득했던 우리집.. 아빠와의 추억이 가득했던 인천을 떠나 서울의 작은 월세방에서 살게되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거죠.................... 생활은 더 나아지지 않았고 힘들어지기만 했습니다. 그 후 엄마는 치킨집을 다니며 닭튀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항상 기름에 데인 시커먼 자국이 가득했던 엄마의 팔..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엄마는 사는게 너무 힘들고 지쳐...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살아야하지만..너무 힘들었던 그때.. 한강앞까지 가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우셨으면 그런생각까지 하셨을까요.. 하지만 두 딸때문에 아빠곁으로 도저히 갈수없었던 엄마.. 다시 어두운 현실로 돌아와야했던 울엄마... 우리를 버리지 않아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렇게 6년이 흘러 저는 취업을 하게 되었고.. 지금의 신랑을 만나게 됐습니다 신랑이 7살 연상이여서 엄마의 반대는 심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저희 신랑도 운전직이었다는것.. 엄마 인생에 큰 아픔으로 자리잡은 아빠의 빈자리.. 그 이유는 교통사고 때문인데... 딸도 자신과 같은길을 걸어가려는것같아 엄마는 극구 말렸지만 저는 엄마의 말을 뿌리쳤고 반항했습니다.. 엄마가 우리에게 해준게 뭐가 있냐며.. 엄마의 가슴에 박아선 안될 대못을 박고야 말았습니다.. 철부지 없던 딸의말에 우리엄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요??? 엄마는 결국 저희를 허락해주셨고 2년이라는 교제를 허락받았습니다.. 2년동안 우리집 다시 살만해지고..돈의여유가 생길때까지.. 교제하면서 서로를 잘 알게되면 결혼을 허락해주신다고요.. 하지만 이 못난딸은.. 또다시 임신으로 엄마에게 실망을 주었지요.. 우리엄마.. 얼마나 마음이 찢어지고 속상했을까요 하지만 울 아기 축복받는 아기가 되게해주려고 오히려 챙겨주고 속상한기색 한번 안내셨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서두르기 시작하셨지만.. 엄마는 또다시 결혼비용의 문제로 많이 속상해 하셨습니다.. 딸이 시집가는데 좋은거 안해주고싶은 부모가 어디있을까요??? 부주금으로 결혼비용을 내고나니 돈이 하나도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에게 세탁기 하나라도 마련해서 보내주지못하게 한으로 남으셨지요 저도 엄마에게 너무 죄송스러워 신혼여행을 포기하고 저렴한 가구를 장만해서 엄마에게 괜찮다고 우리신혼집 가구도 사들이고 했더니 너무 좋다고.... 하지만 울엄마.... 오히려 속상해 하십니다.. 돈이좀 남아서 엄마가 장만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 말을들은 저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철없이 마냥 좋아했는데 엄마속은 그게 아니라는걸.................... 사랑하는 엄마 저 정말 남부끄럽지않게 잘살게요.. 남이보면 철없는 나이지만 아이에게도 부끄럽지않은 그런 멋진 엄마가 될게요 엄마가 우리에게 줬던 정과 사랑 우리아이에게도 듬뿍듬뿍 줄게요.. 아이를 가지고 나서야 엄마의 맘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것같아요.. 혼자 쌍둥이 키우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그 모진세월 홀로 얼마나 쓸쓸하셨어요... 이제서야 엄마의 마음을 헤어리는 못난딸 용서해줘요. 사랑해요 2006년엔 불효만하는 나쁜딸이었지만 2007년이후부턴 착한딸로 엄마에게 웃음만주는 딸이될게요 행복만 전해주는 딸이될게요 천사같은 아가와함께 행복한가정 일구는모습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