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8월 9일)은 한국 마라톤의 날이라고 할 만합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고(故) 손기정 선생이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56년 뒤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달았습니다.
황영조는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모리시타 고이치를 추월할 때 고향 삼척의 어머니와 손 선생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손 선생은 늘 후배들에게 “일본 선수에게는 절대 져서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손 선생의 기록은 100m를 21.23초로 달리는 속도로 42.195㎞를 달렸지만, 한국 아마추어 최고기록보다도, 여자 세계 최고기록보다도 늦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마라토너들이 물을 마시지 않고 뛰었습니다. 물을 마시면 몸이 무거워진다고 믿었었죠. 또 마라토너가 뒤를 보는 것은 스포츠맨십에 어긋난다고 믿고, 아무리 불안해도 오로지 앞만 보고 뛰었습니다. 손 선생은 “스타디움에 들어섰을 때 관중이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기에 영국의 하퍼가 바짝 따라붙은 줄 알았다. 안 잡히려고 죽으라고 달렸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100m의 기록이 무려 13초대입니다.
일제는 이미 대표로 선발된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출전권을 주지 않으려고 베를린에서 경기를 19일 앞두고 다시 선발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재대회를 통과해 올림픽에서도 금, 동메달을 차지해 일본에 치욕을 안겨줬고 식민지의 한민족은 한 달 내내 모이면 마라톤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인터넷에선 “손기정도 결국 일장기를 달고 뛰었으므로 매국노”, “일장기 말소사건의 동아일보는 기자들을 해직했으므로 친일신문”이라는 단순논리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동아일보의 경우 정간을 당했고, 사주가 해직기자들의 생계를 끝까지 도와줬지만 모두 무시되고 있습니다.
“품위 있는 새는 자신의 둥지를 더럽히지 않는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구한말 어리석게 나라를 빼앗겼지만, 많은 사람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손 선생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외국의 웬만한 스포츠 전문가들은 ‘베를린올림픽 시상식의 슬픈 손기정’을 기억합니다. 아테네올림픽 개막식 때 미국방송의 해설자도 한국 선수단이 입장하자 손 선생의 ‘슬픈 얘기’부터 하더군요.
상쾌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무겁고 긴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한국 마라톤 사에 이정표가 세워진 날입니다. 세계를 제패한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한국인의 불굴, 인내의 정신이 세계에 우뚝 선 날입니다.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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