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는 만만한 상대?… 국격(國格)이 무너진다.
김성덕 기자 / 2008-06-12 16:01
-새 정부, 대외정책 뿌리부터 흔들려
-주변국에 번번이 무시… 강력 항의도 안 해
-남북관계 개선 시급… 쇠고기 재협상이 새출발 시금석
지난 7일 저녁 8시10분.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해 한국 소비자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수입되지 않도록 한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을 강구해 주세요.”
통화는 20분간 이어졌다. 통역 과정을 감안하면 실제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에게 선처를 바라는 듯한 이 대통령의 말 어디에도 국가 원수로서의 존엄과 품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30개월 이상 쇠고기만으로 문제를 단정시켜 버린 것도 실무선에서 있을 추가협상의 여지를 스스로 좁혀놓은 결과가 돼 버렸다. 야당은 곧바로 ‘전화사기극’ ‘구걸외교’라는 비난을 쏟아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대외정책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면밀한 전략 검토 없이 즉흥적인 외교를 구사하다보니 ‘줄건 다 주면서’ 뒤통수를 맞거나 무시를 당하는 일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적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고 ‘국격(國格)’이 무너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지난 4월21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자리.
텔레비전을 보던 조형균(79) 계성종이역사박물관 관장은 눈을 의심했다.
이명박 대통령 앞에 놓인 연탁 앞면에 붙은 일본 총리실 마크를 보고서다. 그것은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쓰던 조선총독부 마크이자, 400년 전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유린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문장이기도 했다.
조 관장은 10일자 한겨레신문 보도에서 “내가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예전 한국 대통령 방일 때의 기자회견장 연단에 그 마크가 등장한 적은 없었다”며 “어떻게 저런 자리에 등장할 수 있나. 그날 바로 일본인 친구에게 국제전화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했더니 그분도 놀라면서, 아 그래요? 몰랐는데요, 하더니 거 다분히 의도적인데요, 그러는 거예요”라고 분개했다.
아무리 총리실 마크라고 해도 한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자리에 이 문양이 박힌 연탁이 사용돼서는 안 된다 것이 조 관장의 주장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우리 정부 인사들은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못했다. 눈을 뻔히 뜨고 일본에 모독을 당한 꼴이다.
대일무역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실용적 대일외교는 동북아에서 군사 맹주를 호시탐탐 노리는 일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호기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 일본 정부가 독도를 자국의 고유영토라며 이를 교과서에 명기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다분히 한국의 뒤통수를 때린 사례다.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원칙과 미래전략을 수립하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권이 수시로 일본에 농락당할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준다.
미국과의 관계 역시 상호 이해에 따른 새로운 한미동맹이라기 보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구애에 가깝다.
쇠고기 재협상 문제만 하더라도 이명박 정권은 미국의 요구를 다 들어준 ‘퍼주기 협상’을 벌였지만, 정작 정권이 퇴진할 위기로까지 내몰린 지금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싸늘한 태도뿐이다.
칼로스 구티에레즈 상무장관은 10일 “한·미 쇠고기 협상이 한국 내 시위를 촉발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렸지만 그건 미국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쇠고기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재협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한국 내 목소리에 “한국민들이 과학을 좀 더 배우라”는 안하무인 발언도 했다.
중국이나 북한과의 관계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지난달 말 한·중 정상회담에서 정부는 한·중 관계가 기존의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다고 정상회담의 성과를 자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명박 행정부가 한미동맹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중국을 일본보다도 외교 후순위로 취급하는데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MD(미사일방어시스템)나 PSI(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 참여를 긍정 검토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중국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외교적 결례를 아랑곳하지 않고 거친 자세를 드러내기도 하는데 지난달 27일 이명박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의 정상회담 와중에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한미 군사동맹은 지나간 역사의 산물”이라고 발언, 면전에서 모욕을 가하기도 했다.
대외 관계가 삐걱거리다 못해 주변국들로부터 번번이 무시를 당하는 상황인데, 이를 두고 사람들은 ‘글로벌 호구’라며 이명박 대통령을 조롱하고 있다.
만만한 상대,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지칭하는 ‘호구(虎口)’라는 말이 대외적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의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이러한 주변국의 무례한 태도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교과서 명기에 관해 이 대통령이 항의를 지시한 정도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국가의 품격이 훼손되고 이는 외교적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외신인도, 한국을 바라보는 외국민의 인식 등 다른 여러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지난 10년간 다소 흔들거렸지만 안정적 관계로 발전한 북한과의 관계는 이명박 정권 들어 다시 냉전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정부 출범 4개월째 남북대화는 중단된 상태다. 지난 10년 동안 이뤄진 남북정상 간의 성과물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이 대통령에게 북한은 ‘역도(逆徒)’라고 지칭,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우선 한반도문제가 안정돼야 외교적 난제들도 헤쳐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 개선은 시급한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글로벌 호구’라는 오명을 씻고, 정부출범 직후 제시한 국정목표대로 ‘강한 나라’ ‘선진일류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풀어가야 할 숙제들이 산적해 있다.
그 출발의 시금석은 역시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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