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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엔 정신병자, 후대엔 선지자


BY 서브아트 2008-12-16

▲ 윌리엄 블레이크의〈태고의 나날들〉. /서울대미술관 제공

"현대성은 어떻게 예술에 배태됐나?"라는 질문에 답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국인이 있다. 낭만주의 시인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Blake·1757~1827)다. 계몽주의가 지배하던 18세기 후반에 등장해, 증기기관이 수력기관을 대체하던 시절에 장년기를 보내고, 사진이 개발되기 직전 세상을 떠난 이 인물은 영국의 자랑거리다. 블레이크가 제시한 망상적인 비전이 유럽 대륙의 낭만주의자들과 확연히 구분될뿐더러, 이후 영국의 근·현대 예술가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전은 바로 그러한 영국의 자부심을 확인하고 따져볼 기회다. 영국 맨체스터대학 휘트워스갤러리가 기획한 이 전시는 블레이크의 작품과 함께 그의 동료들, 빅토리아 시대의 계승자들, 모던 컨템퍼러리 작가들의 소품을 제시한다.

중류 가정에서 태어난 블레이크는 집에서 모친에게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와 고등학교엔 입학한 바 없지만, 판화 기술을 익히기 위해 7년간 도제 수업을 받은 뒤, 왕립아카데미에서 6년간 회화를 공부했고, 1784년 27세의 나이에 인쇄소를 차렸다. 진보적인 사상을 그에 상응하는 형식에 담아내고자 애쓴 그는 1788년 보통의 에칭 기법과 반대되는, 독특한 양각 에칭 기법을 개발했고, 문자와 삽화를 통합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채색인쇄를 발전시켰다.

시인으로는 낭만주의로 분류되나, 블레이크의 종교적 삽화는 양식상으로는 선이 강조되는 신고전주의적 특성을 띤다. 임종 직전에도 부인의 초상을 그리고, 품위 있게 시를 읊었다지만, 미술사에 남을 명작을 남기지는 못했다. 동시대인들로부터 종종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던 이 남자의 중요성은 이후 세대,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 미친 지대한 영향에 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이본이 전하는 〈태고의 나날들〉은 후대의 라파엘 전파(前派)와 미술공예 운동가들에게 "현대인이 상실한 영원과의 고대적 결합"과 "인간 이성을 넘어서는 창조성"의 상징으로 간주됐다. 라파엘 전파는 '라파엘 이전의 때 묻지 않은 회화로 복귀할 것'을 목표로 삼았고, 미술공예 운동은 중세적 장인 공동체를 복원해 산업 생산 시대의 미적 저열함을 극복하고자 애썼는데, 양자 모두 블레이크를 '새 시대를 예언한 선지자'로서 숭앙했다.

예언적 분위기의 이 작은 삽화는 인간화된 신의 모습을 제시한다: 바람에 백발과 수염을 휘날리는 창조주가, 구름을 가르는 태양 위에 앉은 채, 심연의 어둠으로 팔을 내려 뻗으니, 손에서 컴퍼스가 빛처럼 뿜어져 나와 시공을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