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들의 성공을 위해서
이명순
제 고향은 전라도 목포입니다. 어머니는 목포 유달산 밑에 자리한 도깨비시장에서 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제가 여덟 살 때 해남으로 이사를 갔었는데, 어머니는 매일 바닷가 갯벌에서 굴을 캐고 게를 잡아다 함지박에 담아서 이고 다니며 팔았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커서는, 새벽마다 리어카를 끌고 생선을 팔러 나가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제가 따라 나선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모르는 아줌마가 우리 집에 왔는데 저에게 자기 집 아이를 돌봐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었는데, 이튿날이 되자 어머니는 그 아주머니 집에 가면 배부르게 밥을 먹을 수 있으니 그 집에 가서 살라고 하면서 저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집을 떠나 그 집에서 두 살, 세 살 먹은 두 아이를 돌보면서 집안일까지 해야 하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를 보다가 조금만 실수를 해도 살갗에 피가 맺히도록 때리는 일이 많아서 서럽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우리 집에 가서 보리를 갖고 오라면서 저를 쫓아냈습니다.
그날 밤 가끔씩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산을 넘어 우리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살림이 궁색하다 보니 다시 이 집 저 집 옮겨 다니면서 12년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내 나이 열아홉에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을 만났는데 너무 힘들고 지친 나머지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어 포기하고, 가슴에 원망을 묻어놓은 채 살아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 네 명을 가르쳐보려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세차하는 주유소에서 밤 10시부터 아침 7시까지 하루 60대씩 세차를 했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부업거리를 가져다 일을 하면서 잠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사위가 텔레비전에서 보고 알았다며 저를 양원초등학교에 데리고 오더니 등록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학교 다니면서 쓰라고 3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통장에 넣어주고, 안경도 맞춰주었습니다.
학교에 와서 공부하니 낫 놓고 ㄱ자도 모르던 제가 매일 받아쓰기 공부를 하여 한글에 눈을 떴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구단도 외워 물건을 빨리 셀 줄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자와 영어를 조금씩 배워가는 것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자신감이 생겨, 아는 척도 많이 합니다. 동화책도 천천히 더듬더듬 읽고, 신문도 읽고, 전철역 이름도 척척 알게 되었으니까요. 글자를 모르던 시절에 느꼈던 생활의 불편함이 많이 줄어든 요즘은 사는 것이 너무너무 즐겁습니다.
지금 84세이신 시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계셔서 결석을 자주하지만, 저를 많이 이해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담임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저희 같은 까막눈을 위해 학교를 세워주신 교장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늦게나마 공부할 수 있게 도와준 큰사위를 비롯하여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낍니다.
힘겹게 살아온 지난 시절을 잊고 남은 세월을 보다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