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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떨어진 아침


BY 동요 2009-09-25

우리 가족들의 아침식사 사랑은 유별나다.

 

남편은 20여년 직장생활 하면서 건강검진 받는 날 빼곤 아침을 걸른 날이 내 기억에 없다.

딸은 늦잠을 자고 일어나도 지각을 할 망정 아침밥은 먹고간다.

밥을 굶고 가면 기운이 없어서 홍알홍알 한단다.

 

빵도 안되고 꼭 밥이어야 한다. 국도 있어야 좋아한다.

그래서 난 전 날 아무리 늦게 잠이 들었어도

아침밥 굶으면 쓰러지는 사람들 때문에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고서라도 밥을 차려야 한다.

 

근데 우리 엄마처럼 지극정성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의 가족들 아침식사 챙겨먹이기는 대단했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건 한 번도 전 날 저녁밥을 아침에 먹인 적이 없다는 거다.

아무리 이른 새벽 가족 중 누군가가 집을 나가도 엄만 그 가족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셔서

따끈한 밥과 국을 지어 식사를 하고 집을 나가게 하셨다.

 

난 아침에 밥을 짓는 걸 원칙으로는 하지만

보온밥통 속의 밥을 차리거나 전자렌지를 이용하여 데워 밥을 차리기도 한다.

때론 예약버튼 눌러 놓기도 하고.

 

가족들의 아침식사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극진하니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는 버룻이 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늘 냉동실에 누룽지를 만들어 넣어둔다.

 

식은 밥을 돌판에 얇게 펴고 요리조리 돌려가며 누룽지를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두고

아침에 국이 마땅치 않거나  입이 깔깔할 때 물을 넣고 끓이면 정말 구수한 맛이 나는

아침식사 대용식이 된다.

이 비상식량은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데 만들기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태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누룽지 덕을 본 일이 며칠 전 있었다.

딸 학교 갈 시간에 맞춰 식탁을 차리고 밥을 푸려고 밥솥을 여는 순간 깜짝 놀랐다.

생쌀 그대로인 것이다. 물에 조금 불려 놓았다가 전원버튼을 누른다는 게 깜빡 잊었다.

전 날 먹던 식은 밥도 없었다.

냉동실에 있던 누룽지를 급히 끓여 주었더니 술술 잘 넘어간다고 맛있다고 한 그릇 먹고 학교를 갔다.

휴..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어제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하려고 쌀을 꺼내는데 쌀알이 돌돌 굴러 나온다.

쌀이 떨어진 것이다.

전 날 쌀을 꺼내고 쌀통 거의 빈 거 확인하고 쌀 사와야지 했는데 깜빡잊었다.

요즘들어 깜빡 잊는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돌아서면 뭐든 가물가물 한다.

 

놀라서 냉동실을 열었더니 누룽지도 없다.

해결방법 찾으려고 좋지도 않은 머리가 바삐 움직인다.

아침을 안 먹으면 비실거린다는 딸 밥을 해먹여 보내야 하는데 이 시간에 문 열어 놓은 수퍼도 없을 덴데 어쩌냐..

 

가족들 몰래 살짝 나와 자동차를 타고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건만 아무데도 쌀을 안 판다.

남편이 알면 도대체 주부가 집에 쌀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정신이 있니 없니 하며 두고두고 놀려먹을 게 뻔하다.

고민하다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맞다!! 떡집!! 떡집은 항상 새벽부터 주문한 떡을 만들려고 일찍 문열어 놓는다! '

 

예상은 적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새벽부터 만들고 있는 떡집 아주머니께 쌀을 두됫박 샀다.

아주머니는 요즘은 쌀통에 쌀을 넣어 두어서 떨어진 걸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고

크게 변명도 안했는데 새벽부터 부끄럽게 쌀 사러 나온 주눅들린 날 위로까지 해주신다.

 

새벽에 이 난리 친거 살짝 숨기려 했는데 비닐봉지에 쌀 넣어 들어가다가 남편에게 들켰다.

다행히 아이들에게는 안 들켜서 천만 다행이다.

남편이야 숨기려 해도 나 정신없는 거 이미 다 알고있는 사람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떡하든지 숨겨야 한다.

 

미리 준비하고 미리 체크하고 절대 허둥대지 말고 항상 메모하는 습관 가지라고 교육하는데

내 모습 알면 교육이 제대로 안 될 거 같아서다.

앞으론 아이들 가르칠 때 당당할 수 있게 행동 잘해야지.

 

쌀 떨어져 동네 한 바퀴 빙글빙글 돌면서

마음에 잊혀지지 않을 교훈하나 가슴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