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퇴근길엔 지인과 술자리를 함께 했다.
술김을 빙자하여 지인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내용인즉슨 지금 하고 있는 생업이 여전한 불황으로
말미암아 전도양양(前途洋洋)이 아니라 그 반대인 전도무망(前途無望)이란
사실의 고찰을 드러내며 지인은 더욱 낙담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애들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와 중학생인데
내 벌이는 늘 이렇게 절벽을 타는 심정이니...”
그러면서 지인은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하다며 연신 술잔을 ‘원샷’으로 ‘꺾었다’.
나이는 나와 별반 차이가 없는 지인이었다.
그래서 존댓말은 하지 않았으되 여하간 ‘경험자’의
입장에서 지인이 매우 딱해 보이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기운 내! 앞으론 경기도 좋아진다고 하니 나아지겠지 뭐...”
어제 통음을 한 지인은 결혼을 늦게 한 때문으로
아이들이 대학도 못 간 ‘이제 겨우’ 고교와 중학생이다.
하지만 나는 지난 2월에 두 아이를 모두 대학의 학사모를 씌운 졸업생 아빠다.
이같은 내 조혼(早婚)의 곡절은 어려서 잃은, 그래서
부재(不在)했던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 등에서 기인한 것이 동인(動因)이긴 했다.
그렇긴 하더라도 일찍 간 빈한한 무지렁이의 장가는 숱한 간난신고의
단초를 더욱 짊어지게 하는 고생의 지게이자 삽질의 연속으로 작용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딸이 여대생이 되어 상경한
지난 5년 전부터 나는 더욱 극심한 빈곤의 노예가 되어야했다.
벌이가 늘 시원찮았던 때문으로 매달 딸에게 생활비 등을 송금해 주자면
나는 그야말로 내 생활의 일부를 고스란히 포기하든가
아님 알면서도 모르는 체의 얼추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방증으로써 점심 값이나마 아끼자고 만날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음은 기본옵션이었다.
다음으론 동창회조차 회비가 없어 일부러 관한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던 날들도 부지기수다.
달랑 신김치 하나만이 반찬인 도시락은 때론 영양실조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뙤약볕 한여름엔 나를 기진맥진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같은 노력이 나중엔 반드시(!) 결실을 맺어
‘한 우물만 파면 노다지도 나온다’는 어떤 신앙으로까지 자리매김했다.
그러했음으로 나는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참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나의 정성은 그 빛을 바래지 않았다.
딸은 지난 2월에 서울대를 과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까지 내게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삽질’이란 건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일을
말하는 동시에 괜히 쓸데없는 행위를 비꼬아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 5년 여 동안 나는 어떤 ‘삽질’에 충실해 왔다.
그렇지만 그 삽질의 행위엔 분명한 목적과 후일의 결과를
투시하는 나만의 혜안(慧眼)이 있었기에 묵묵히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