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26

변함없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


BY 일필휴지 2010-06-29

 

조실부모한 건 그렇다 쳐도 집안이 매우 어려웠고

개인적인 풍상마저 겹치는 바람에 남들처럼 많이 배우지 못 했습니다.


그 바람에 군복무를 마치고 처음으로 시작한 직업은

지금도 변함없는 세일즈맨, 즉 비정규직의 ‘영업사원’입니다.


아무튼 제가 나고 자란 고향인

충남 천안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온 건 지난 27년 전입니다.

당시 근무했던 직장에서 주임으로 승진하면서

인천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만 배신과 좌절의 쓴 맛을 보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계기가 되어 상위 조직인 대전지사로 발령이 나는 행운을 잡게 되었죠.

그 때 아들은 겨우 생후 백 일을 갓 넘었는데 처음엔 도마동의 셋집에서 기거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저는 소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또 다음해엔 딸을 낳았지요.

처음에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도착하니 직원들은

대전의 명물이라면서 선화동의 먹자골목으로 데려가 두부 두루치기를 사 주더군요.


그 때에 단골이 된 ‘청양식당’은 지금도 변함없는 저의 30년 가까운 단골집이랍니다.

대전에서 저는 또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 1987년의 ‘6월 항쟁’과 더불어

노태우 대선 후보의 어쩔 수 없는 ‘6.29 선언’이 있기 전엔 그 독한

최루가스까지를 마셔가며 ‘넥타이 부대’에도 가감했던 자칭 열혈시민이기도 했습니다.


이러구러 세월은 더 흘러 아이들은 모두

대전에서 초.중고교를 마쳤고 아들은 충남대학교에 진학했지요.

그 뒤 딸은 서울대에 합격하는 바람에 서울로 상경했고요.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제가 승진했던 직장은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저는 그동안 참 어려운 직장과 생활고를 덩달아 점철해야만 했지요.


그건 바로 비정규직의 박봉이란 세일즈맨의 어떤 가시밭길만을 헤쳐 온 때문입니다.

여하간 제 처지는 그처럼 어렵고 불운했을지언정

아이들만큼은 잘 가르치자고 오래 전부터 작심했습니다.


근데 서울로 유학 가 있는 딸의 교육비 부담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어려웠습니다.

하여 오죽했으면 자그마치 몇 년 동안이나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는 자린고비 행각까지도 마다치 않았을까요!


이는 점심 값이라도 아껴야만 비로소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는 매우 척박한 경제적 현실의 어떤 반증이었지요,


고군분투 끝에 마침내 올 2월에 아들과 딸은 모두 대학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졸업 전엔 대기업으로의 취업에 성공하여

지금은 꽤 두둑한 급여를 받는 신입사원입니다.


딸은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지금도 서울 신림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요.

생업이 시원찮은 까닭으로 제가 ‘투잡’으로 시작한

모 인터넷 언론의 시민기자 생활은 올해로 어언 9년차를 맞습니다.


한데 늘 그렇게 스스로 공부를 하고 더불어 글을 쓰는 습관의 덕분으로

저는 이제 다음 달이면 모 문학회를 통해 정식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저로서는 이곳 대전이

우리 세 부자(父子)의 꿈을 두루 이뤄준 도시라고 믿습니다.

제 나이 올해로 52세입니다.


그런데 제 나이의 반 이상인 27년을 살고 있는 대전이고 보니

그렇다면 이는 분명 제 2의 고향이 아니라 되레 명실상부한 고향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대전시민의 허파인 보문산과 계족산, 그리고

식장산이 지척에 있어 주말이면 즐겨 오릅니다.

대전과 충남도민의 젖줄인 금강의 친정인

대청호 또한 언제 가도 마음이 푸근해 지는 곳이죠.


대전의 자랑은 비단 여기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칼국수 타운이 따로 조성되어 있을만치의 각종의 ‘맛자랑 도시’가

또한 대전이며 전국에서 보기 드물게(제가 보기론)

지역감정이 없는 곳이 바로 또 이곳 대전이니까 말입니다.


저를 글쟁이로, 또한 제 사랑하는 아이들을 훌륭한 직장인과

좋은 대학으로 보낼 수 있도록 그 토양을 아낌없이

제공한 대전을 저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사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