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찾아 든 봄날의 제천 의림지는 고요하다.
이따금씩 불어대는 봄바람이 솔잎과 버드나무 가지를 사정없이 흔들어대지만,
오랫만에 기운을 차린 하늘빛은 청아하고 잔잔히 이는 물결위에는 투명한 햇살이 눈부신 은빛을
틔워 올린다.
그러나 푹신하게 낙엽들이 쌓인 둑방 길은 푸릇한 기운 하나 없는, 여전히 침침한 겨울빛이 가시지
않았고, 데문데문 둘러봐도 아직은 봄이라고 딱히 내세울 전경이라곤 없건만 그럼에도 굳이 봄날의
의림지라 말하는 것은 성급한 나만의 욕심이 아닌 시절의 순리 때문이다.
신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서 또 하나의 문을 연다고 하질 않았는가.
그러니 겨울 문이 닫힌 이즈음,
봄의 문은 이미 열렸고 다만, 밍그적대며 토해내지 못하는 봄의 기운을 가늠해
"의림지엔 이미 봄이 왔노라"며 섣부른 봄타령을 해 본들 무엇이 문제랴.
호수처럼 광활한 저수지 둑방을 따라 솔향에 젖어가며 설렁설렁 느릇하게 걸음을 옮겼다.
물 가운데 동그마니 떠 있는 작은 섬 하나가 의림지의 넓고 평평한 수면을 심심치 않게 하고,
연신 부산스레 섬 주변을 돌며 유영과 날개짓을 하는 한떼의 물오리가 수면위에 쉼 없는 파문을
그려대자 비로소 정적속으로 침잠하던 한낮 의림지는 생명의 온기를 풀어 내기 시작 한다.
작은 섬과 어우러진 참한 정경의 의림지.
의림지는 1000여전에 인공으로 만든, 주변 마을의 부족한 농업용수를 해결하던 생명의 젖줄이었지만,
지금은 제림의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제방을 따라 열을 지어 선 벚나무들이 만드는 아름다운 주변
경관에 영호루와 경호루, 우륵정등 의림지의 경치를 조망 하는 정자가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
휴식터이자 나들이 장소인 명승지다.
얕으막한 제방을 따라 이어진 길은 포실한 햇살과 땅의 훈기로 푸릇한 빛깔이 제법 싱그럽고,
오랫만에 보는 더 없이 쾌청한 하늘빛은 의림지의 물빛 또한 맑고 투명하게 했다.
그랬다. 봄볕이 따사롭게 내려 앉은 의림지는 이미 봄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분수굴로 가는 길목인 나무 다리 입구에 세워 진 솟대는
잠시 전 작은 섬 옆에서 노닐던 물오리떼가 날아 앉은듯 금새라도 비상 할 태세다.
솟대 기둥을 지나 문으로 들어서면 아치형 목조 다리가 있는데
이따금씩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림자가 물결에 어리는 풍경은 봄빛 생생한 한폭의 수채화가 되곤한다.
임지나 의림제, 또는 의림지라고 불렸고,
사람들은 이 큰 저수지를 호수라 칭하기도 했기에
의림호의 서쪽 지방이라는 의미로 충청을 호서 지방이라 했다.
덧붙여 제천의 옛이름인 '내제'는 큰 제방이란 뜻이 유래한 것이란다.
그러나 의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이유가 있는데
바로 가야금의 악성, 우륵 선생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의림지 축조도 우륵선생이 했다는 설과
노후에는 의림지 물결을 바라 보며 가야금을 탔다던 우륵대(제비 바위)가 있고
선생이 마시던 우물인 우륵정등, 우륵선생의 자취를 품은 곳으로
아름다운 경치에 더해 신비함까지 지닌 유서 깊은 명승지다.
의림지 물가에는 유난히 물을 향해 굽어지고 휘어진 나무들이 많은데 고아한 자태의 노송이 휘영청 제 몸을 물결 위에 내려 놓았다.
노송의 쩍쩍 갈라진 등걸은 나무가 살아 낸 지난한 삶의 시간표가 되고,
곧 물에 닿을듯 기울어진 가지는 의림지의 변함 없이는 푸르른 물빛을 향한 긴 시간, 깊은 그리움의 흔적인양 아릿함을 준다.
(소나무도 사람과 같이 나이가 들면 등걸이 휘어지는 처짐현상이 생긴다.)
휘적휘적 둘러 본 의림지 물가의 나무들은 거개가 물 가까이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랬다. 덕지덕지 세월을 업은 소나무도
곧 터뜨릴 화사한 꽃망울을 머금은 벚나무도
그리고 휘영청 온 몸을 다 내려 놓을 태세의 나이 많은 버드나무 마저도
의림지의 물빛이 매양 그립다는 듯 하염없이 물 곁으로 다가서고 내려서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 물길을 따라 걸어보는 산책로가 의림지를 따라 조성되어 있다.
봄볕 아래 다정히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이르게 피어 물위로 날아 든 꽃잎인양 의림지 수면을 점점이 수 놓았다.
안온한 봄 기운속에 사람이 꽃이 되고 물이 꽃을 품은 의림지의 봄날 한낮이 마냥 화사하다.
인공폭포인 분수굴을 가로 질러 가면 조붓한 수변테크가 물길과 맞닿아 이어진다.
산책 삼아 수변데크를 걸어 가노라면 겨우내 얼었던 물줄기를 시원하게 쏟아내는 분수 소리가 왈츠의 선율처럼 경쾌하고,
사철 푸르른 소나무 숲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물빛과 마음을 짙푸르게 물들인다.
찰랑찰랑, 햇살을 부숴가며 잔잔히 이는 물결따라
솔솔 싱그러운 솔향이 피어 오를듯 의림지 물속에는 소나무가 빼곡한 소나무 숲, 또 다른 제림이 있다.
의림지는 1000여년전에 절박한 농업용수가 필요해 인공으로 만든 저수지였고,
근래에 조성한 인공폭포와 수변데크 또한 의림지를 찾아 오는 사람들을 위한 조형물로만들어졌다.
그럼에도 1000년전 저수지를 만들었던 예전의 손길과 맞닿은 현재 조성 된 설치물이 어설픔 없이 조화를 이룬다.
아마도 의림지 물위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과 조화가
멈추지 않고 일어대는 물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고 생성되는가 보다.
의림지의 물결을 밟고 물빛을 담아가며 걷는 산책로 수변데크는 의림지의 또 다른 아름다운 변신으로,
여울지는 물결을 바라보며 설렁설렁 걸음을 옮기노라면 아직은 산그림자를 품고 있어
가끔씩 물 위를 스쳐 불어 오는 서늘한 바람이 오소소 소름을 돋게도 하지만,
긴 데크를 따라 걷느라 송송 맺힌 땀방울을 한순간 싸악~ 가시게 하는 청량함이라니...
의림지의 간이 놀이공원, 의림지 파크가 가까워지며 수변데크가 끝나는 즈음에 만나는 풍경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나무들이 물속을 유영하고 나무가 드리운 물결위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릴때마다
물위를 비추는 햇빛은 나무들의 은빛 반짝이는 잎새가 되어
무성한 빛의 잎새들을 흩뿌리거나 모우기를 해댄다.
의림지의 나무들은 모두 물과 햇살과 바람과 친한가 보다.
물속에 제 삶을 의탁한 나무들의 등걸은 봄빛이 더 흠씬 젖어 있었다.
드디어 수변데크가 끝나면 오붓하고 속닥한 산책도 마쳐야 한다.
무지개 다리를 넘어서면 바로 다시 의림지의 입구로 향하는 길이다.
의림지 입구로 되돌아 나와 영호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물론 분수굴의 반대방향으로 가도 영호정을 만날 수 있지만
조금은 여유롭게 의림지를 돌아 보기로 했던 마음을 좇아
큰도로에 인접해 있는 길을 걸어 우륵정을 지나 솔숲으로 다시 들어 서는 길을 택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 했다는 제비바위 뒷편에 2년전 우륵정을 세웠는데 정자위에서 내려다 보는
의림지는 둑길을 걷는 것과는 다른 운치가 느껴진다.
봄이 더 깊어지면 벚꽃이 하얀 눈처럼 날리는 아름다운 의림지 둑길의 풍경이 우륵의 가야금 선율을
따라 그윽하게 펼쳐 지리라.
의림지의 가장 중요한 수문이 살픗 비밀의 문 일부를 드러냈다.
물을 막기도 하고 물길을 여는 수문의 크기와 바닥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하는 배수구 축조술이 저수지의 생명인데 의림지 배수구 밑바닥에는 수백관에 달하는 큰돌을 네모로 다듬어 쌓아 올려 수문 기둥을 만들었다고 한다.
치수의 중요함을 알았던 조상들의 지혜가 의림지 밑바닥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둥그런 못은 파란 유리를 골고루 펴 놓았구나"라고 일찍이 추사 김정희님이 읊었다던 의림지의
푸른 물빛을 따라 사부작사부작 제방길을 걷는 사이 이우는 햇살이 마지막 빛을 쏟아낸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물길에 수북한 곁가지를 내리고 물결에 제 몸을 맡긴다.
그리곤 이내 물을 스치우나 싶더니 후두둑 소리를 내며 물방울을 날린다.
의림지의 봄은 제림이라 불리는 솔숲과 아름드리 버드나무의 살랑거림에서 시작되나 보다.
영호정으로 가는 길목마다에는 쉼을 위한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의림지를 바라 볼 수 있다.
1.8킬로미터에 이른다는 의림지를 돌아 보는 관광객들을 위한 작은 배려지만 의림지 경관과 어우러지는 나무의자가 참하다.
영호정이 보인다.
영호정은 의림지 남쪽, 제림으로 가는 제방에 자리하고 있는데,
순조때 이집경이 건립 했으나 6.25때 파괴 된 것을 1954년 후손인 이범우가 중건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영호정은 또 다른 역사적 장소 이기도 한데,
정미의병 창의 당시에 제천 의병장이던 이강년이 부하들과 영호정에서 정세를 논했다고 했다.
더불어 이 영호정을 지나 이어지는 노송들의 군락지를 두고 '제림'이라 칭하며 2006년 국가지정 문화재 20호로 정했으며, 소나무들은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11호로 지정 된 유명세가 대단한 소나무다.
의림지의 물은 1000년의 시간을 담았다.
태총에 수 많은 사람들의 손길로 만들어졌고, 또 수 많은 시간동안 흙과 곡식의 갈증을 풀어 주기도 했으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전경,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던 의림지.
제천 10경 중에서 감히 제 1경으로 으뜸의 명성을 지닌 의림지를 만났던 반나절을 봄날의 추억으로 채곡채곡 저장한채 작별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문득 시선을 잡는 이름 하나가 보인다.
공어.
속이 비었다는 뜻으로 '공어'라고 불리는 의림지에서 자생하는 민물고기로
공어는 빙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1월과 2월, 단 두달 동안만 의림지 주변에서 맛 볼 수 있다는 공어를 요리 해 판매하는 상점들은
공어의 명성만을 걸어 둔채 파시를 했다.
하마 어떤가.
봄의 문이 닫히고 여름의 문과 가을 문이 닫힌 후 겨울의 문이 열리면
의림지의 공어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이곳을 다시 찾을 것이니.
뉘엿해지는 햇살을 등지고 영호정을 벗어나는데 은은한 솔향에 실려 들려 오는 가야금 선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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