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으나,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가지 않는다.
--생트 뵈브--
생트 뵈브(1804~1869) 프랑스.문학사가.비평가.
세무 공무원의 외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파리에서 고전을 중심으로 한 인문주의 교육을 마치고 의학을 공부했으나 1년 뒤에 그만 두었다.
재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별로 뛰어나지도 않았던 그가 일반 교육을 계속 받으며 스승의 권유로 언론계에 들어갔다.
스승 뒤부아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글로브'라는 자유주의 잡지에 빅토르 위고의 시에 대한 평론을 발표하고,이내 낭만파 작가들로 이뤄진 문학단체의 일원이 됐다.
한편 그는 사회 문제와 종교적 체험이라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고,클로드 앙리 드 생 시몽 백작의 가르침을 따르는 개혁가들에 애착을 갖게 됐다.
생 시몽의 제자들은 봉건 체제와 군대 제도는 기업 경영자들이 관리하는 체제로 바뀌어야 하고,교회가 아니라 과학자가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830 년대에 그는 동시대인들의 '초상'에서 살아있는 유명 작가들의 정신적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작가를 여러 각도에서 포괄적으로 연구하고 상당히 면밀하게 조사하는 새로운 비평 방법을 개발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1834년 그는 소설에서도 솜씨를 발휘하여 '육욕'을 발표했는데,이는 좌절과 죄악,종교적 분투,육체와 악마에 대한 거부를 지극히 고통스럽게 탐구한 작품이다.
17 세기 은총의 교리에 대하여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견해를 내놓은 것으로 유명한 포르 루아얄 수도원에서 강의를 위해 '포르 루아얄'초고를 썼으며,
그 후 20년 동안 여러차례 개정판을 냈고,학식과 식견 및 역사적 통찰력이 결합된 이 기념비적 저서는 그의 다양한 지적 모험의 대부분을 반영하고 있다.
184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됐을 때는 '포르 루아얄' 제 1,2 권이 출판돼 있었으며,
이미 낭만주의 작가들과 관계를 끊고,낭만주의 운동 가운데 그가 보기에 지나치게 무절제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비판하게 됐다.
1849년에 파리로 돌아온 그는 한 평론지에 주간 평론을 쓰기 시작했으며,발행일을 따서 '월요 한담'이라 이름 지은 평론집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20년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끊임없이 수많은 평론을 쓰고 연구를 계속했다.
종교문제에서 활기찬 감수성과 호기심을 유지했지만,자신은 어떤 종교도 가지려 하지 않았고,진화에 대한 논쟁에도 무관심했다.
거의 수도승처럼 금욕적이고 안락한 독신생활을 하면서 ,산업주의의 등장이나 제국의 경제논쟁에도 거의 무관심했다.
반면에 그의 사회 의식은 지극히 예민했다.
그는 옛 친구들이 궁정에서 영향력을 갖는 것을 환영했으며,사회적 낙오자에 대한 그의 동정심은 자선활동,대중교육,자립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졋다.(브리태니커)
수도승처럼 금욕적이고 안락하며 자유로운 독신생활을 즐기는 것과 사회 의식이 예민한 것이 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하는데,
생트 뵈브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미개인은 아무 것도 이룬 게 없다는 것이 다르다.
하지만 생트 뵈브는 죽었고,미개인은 앞으로 50여 년을 더 살고 싶어하며 건강관리를 하고 있으니,
그릇 자체가 크질 않아서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는 없겠으나 희미한 무언가라도 남기고 싶어하며 더욱 매진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천호지 공원에서 시위를 하며,동시에 '좋흔남' 운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것이 ,'쓰레기는 가져가시고 추억만 남겨주세요!'란 말이다.
물론 어딘가에서 보고 공감하여 도용하는 말이다.참으로 멋진 말이 아닌가?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올 수 없는 과거로 흘러가고 있지만,추억만은 죽을 때까지 남아서 ,나이들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의 훌륭한 양식이 돼 준다.
나이든 사람들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잖은가!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보람을 느끼고,고난을 극복하고 ,얼마간의 성과를 얻기도 하고 쓰러져 다치기도 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할 양식의 재료이다.
내가 오늘을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미래의 양식의 질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바짝 긴장이 되진 않는지?
대충 살아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면서 각오가 새로워지진 않는지?
나는 아직 50대에 불과하지만,진작부터 추억을 즐겨먹고 살고 있다.
그런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었기에 딸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좋은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추억을 쌓아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럽 배낭 여행을 40 일 간 보냈다.
좋은 추억이 그닥 풍족하지 않았던 전처가 '늬들은 나중에 추억할 게 많아서 좋겠다'며 시샘을 할 정도로 다양한 추억거리를 제공해왔다.
나는 어려서 전기도 아직 들어오지 않던 외가에서의 추억이 참 정겹다.
방학이면 가서 나이가 비슷한 이모들도 있었고,그들의 친구들이 할머니네 사랑방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화로에 군고구마나 군밤을 구워먹고,
근처 저수지 상류에 가서 물고기고 잡고 물장구도 치면서 놀았던 추억,
저녁을 지을 때면 아궁이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아 고구마랑 감자랑 구워먹던 추억,
밤새도록 엿을 고시던 할머니 곁에 붙어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도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시던 엿물을 받아 먹고,
선반위의 조청단지를 꺼내서 몰래 먹으려다 깨먹어서 오지게 혼이 났던 추억도 있다.
집이 관악산과 삼성산이 만나 이룬 계곡참에 있었기에 ,산으로 계곡으로 뛰어다니며 ,술래잡기하며 놀았던 추억,
어머니께서 실로 떠주신 옷을 입고 비스듬한 바위를 미끄럼틀 삼아 놀고 들어와선 뻥 뚫린 옷때문에 얻어맞기도 했고,
숨바꼭질을 하다가 좋아하던 여자친구와 같이 좁은 구석에 숨어서 마구 방망이질을 쳐대던 가슴을 주체하느라 혼이 났던 추억.
성인이 돼서도 워낙 개구장이 기질이 다분했던 탓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원 화성을 무대로 할 짓 못할 짓을 해댔고,
염소를 기르며 한동안 시골의 목부가 돼서 힘들어하면서도 행복해했던 기억도 있다.
막노동을 하다가 새참 시간에 생전 처음 막걸리 한 사발을 받아들곤 꿀맛처럼 달콤한 게 막걸리구나 느꼈다가 ,
나중에 정식으로 막걸리 사먹으러 주점에 갔다가 고생을 한 일...
군대가는 친구 송별식을 하러 간 나이트 클럽에서 친구의 X누나를 꼬셔 연애를 하다가 다시 다른 친구에게 빼앗겨도 보았고,
사랑과 이별도 참 많이도 해봤고,그리고 배를 주려보기도 했고,흥청망청 유흥에 빠져 넋이 홀라당 빠진 채 바보처럼도 살아봤지만,
매번 낙이불음(樂而不淫)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행동철학이라 내세우며 깊이 빠지지 않고 살아온 끝에 나같은 바보도 이만치라도 행복할 수가 있다.
즐겨라,삶을...철저히 즐겨라,하지만 빠지진 마라,집착하지 말지어라~
제일 끝의 음란할 음자를 빠질음자도 된다고 우겨가며 떠들어대던 말...
퍼내도 퍼내도 계속 솟아나오는 나의 추억의 노트는 꽉 차 있고,지금도 하루하루 쌓아가고 있으니 ,
추억부자인 나는 심심산골에 혼자 들어가 살아도 전혀 외로워하지 않으며 히죽히죽 웃어가며 살아갈 수가 있다.
추억은 아름답지만도 않고 고통스럽지만도 않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듯 추억여행의 여정도 더런 힘들고 고통스럽다가 즐겁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하기만 하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불행한 것이라고 나쁜 것만도 아닌 것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럽기 그지 없는 것이라면 나중에도 씁쓸해서 자연스레 얼굴을 찡그리게 되진 않을까?
그것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한데...
나중에 쓸쓸하고 외롭고 울적할 때면 떠올려 방긋 웃을 수 있도록,그러면서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
하루하루를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 애를 쓴다면 지금도 좋고 나중에 추억의 뜨락을 거닐며 위안을 얻을 때도 좋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미련을 갖는 대신 추억의 뜨락을 거니는 것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오늘도 후회없이 살아보자!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