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한 일교차를 피해 약간 여유있게 아홉 시가 다 돼가지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여유를 부린다.
총 4단 기어 중 최고단이 망가진 고물 오토바이에 벌초 기구와 약간의 비상식량,그리고 세면 도구 등을 싣고,
혹시 모를 고장에 대비한 최소한의 부속 등을 준비한 후 기름을 그득 채우고, 얼마간의 불안감을 붙안고 출발~!
약간 서늘한 공기가 염려는 됐지만 춥다 생각되면 우비라도 입을 생각을 하고 ,엔진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기어 포지션에 맞춰 부드럽게 액셀을...
높디 높아진 가을 하늘과 뭉게뭉게 피어 오른 솜사탕 같은 구름도 벗삼고,
논이나 밭에서의 수확의 흔적을 보며 얼마간의 풍요로움도 느끼고,
아직 휴일 아침인지라 상행도로가 막히지 않는 데다 후미진 시골스러운 길을 즐기는 성향 탓에 한껏 여유로운 하이킹을 하는 기분으로,
이후로 여생을 길에 바치고 싶어했던 꿈의 첫발을 떼는 기분으로 가을 분위기를 흠씬 온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달린다.
평택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곳에서 ,생소한 길로 직진을 하며 헤맴이 시작된다.
어라?방향이 비슷해서 언제든 원래의 길로 접어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정표가 전혀 다른 곳을 알리고 있는 것에 망연자실도 했지만,
가다가다 안 되면 되짚어 가면 되지~하는 배짱으로 수원쪽으로 가야 할 길을 용인쪽으로,광주쪽으로 달리는데...
가다보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정해진다.
30여 년 전 내가 다녔고,지금은 큰 딸이 다니고 있으며,내년부턴 작은 딸이 다니게 예약된 회사가 있는 곳엘 꼭 가봐야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동탄 신도시가 건설 중인 현장들의 차단벽 사이를 꼬불꼬불 가서 망포동이란 낯익은 지명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안도감이...
회사생활을 마무리할 때까지 한 시골집의 문간방에 세들어 살면서 시골정취에 흠뻑 빠졌었고,
막간을 이용해 염소를 길러보기도 했던 곳이 현재 망포동의 옛 지명인 망포리였기에...
그 전에 말통골이란 이름의 , 수원시의 당시로선 가장 가장자리였던 동네에서도 달동네에 세들어 살았었는데,그런 지명은 찾을 수가 없었고,
당시의 흔적도 말끔히 사라져서 망포동이란 지명과의 만남으로 아쉬운 일별을 하고...
바로 등장한 기업 시티로 엄청나게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진,내가 다니던 시절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어져버린 곳으로 접어든다.
전기,전자,코닝,전관이란 대기업의 회사가 옹기종기 모여있던 네모반듯한 모습은 흔적도 없고,단지 전기 회사가 약간의 흔적만을 남겨보여준다.
흠~내 딸이 여기에 다니고 있고,회사 근처 어딘가의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딸이라도 만나본 듯 흐뭇해져본다.
하지만 머묾이 별 의미가 없었기에 쓰윽 지나치면서 일별을 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미혼 시절 연상의 두 여인들과의 추억을 오롯이 간직한 원천저수지 부근의 ,옛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는 ,이름만의 그곳을 달려 광교신도시까지 털털거리고 달리며
격세지감도 느끼고 과거의 아련한 추억도 곱씹으며 얼마간의 무력감과 아련함 사이를 오가는 혼란한 분위기에 빠져본다.
그러다보니 동수원 IC를 지나고 ,경기대를 지나 수원 화성 창룡문을 지나게 되는데...
당돌한 여고생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아 풋풋한 사랑을 나눴던 동네이다.
당시 허름한 판자촌 같았던 그녀의 집이 있던 동네는 어느새 번화해져만 있다.흠~
당돌했지만 건방지진 않았고,풋풋한 사랑으로 기억돼 주는 그녀,지금쯤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잘 살고 있겠지?
조원동을 지나... 예전엔 한일합섬이란 어마어마한 회사가 있던 자리에 한일타운이라는 대규모 타운이 형성돼 있는 골목골목을 헤매며 나선 곳이 드디어 1번 국도.
평택에서 줄곧 달려오려던 길과 만나게 된다.
두 시간 가까이 방황 끝에 드디어 탈출구를 찾은 듯한 안도감이랄까?
효행공원이 형성돼 있고,여전히 프랑스 참전비가 건재한 지지대 고개에 잠시 멈춘다.
헬멧을 벗고,두 겹으로 착용한 방진 마스크도 벗고,헬멧 안에 쓴 모자도 벗어던지고 털푸덕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던 즈음이었다.
의왕에서 수원까지 통학을 하던 버스에서 당시로선 날라리 여학생들의 아지트로 유명했던 영신여고생에게 미팅을 주선해달라고 청했고,
당시로선 모범생의 대명사였던 수성고생들과의 미팅이 성사돼서 ,드디어 미개인의 생전 첫 미팅이 이뤄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도록 눈이 쌓인 이곳에서 덜덜 떨면서 5대5 미팅이 이뤄졌고,그래도 좋다고 풋풋한 까까머리 촌놈들과 상큼한 여고생들이 깔깔대며 게임을 하고,
짝을 이뤄 수원 시내로 이동을 해서 빵집에 찾아들어 애프터를 즐겼지만 워낙 촌놈들이었던 수성고생들은 모두 딱지를 맞았던 것 같다.
다른 녀석들이야 어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딱지를 맞았던 것 같다.
당시 내성적이기만 했던 나를 지목해서 미팅을 주선해보라는 친구녀석들의 재촉에 마지 못해 제안을 했고 성사를 시켰던 것인데,
너무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애송이 동급생들이 그 여고생들에겐 시시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래도 부들부들 떨며 여고생에게 말을 걸고 ,성사를 시키곤 몇날 며칠을 잠도 못이뤄가며 설레다가
드디어 안양의 한 중화요리집에서 만나 수원 지지대 공원으로 향해 순백의 설원에서 빙 둘러 앉아 수건 돌리기 게임 등을 이끌었다는 게 ,
나로선 앞으로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충격적 설레임을 안겨줬기에 ,
이후로도 이 고개를 넘어갈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편하게 쉬면서 담배 한 대 깊이 들이 마시고 내쉬어주고...
이내 완전군장을 갖춘 후 지지대 고개를 사이로 나뉜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를 넘어서서 야만인(野蠻人)이란 별명을 가졌던 친구가 살던 고천동에 접어든다.
당시에도 미개인이란 별명을 쓰던 나를 흉내내서 작명을 했던 것인데,진짜 야만스러운 놈이었다!^*^
고천동에서 청계동으로 넘어가는,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며 ,스무 살 무렵엔 이 고개를 자전거를 타고 쉬지 않고 넘었다는 생각을 하려는데,
서너 팀이나 자전거를 타고 진짜 넘어가고 있다.
내가 지금도 저렇게 자전거로 넘을 수 있을까?
그들이 웬지 친근해 보인다.
과천과 봉담을 잇는 외곽도로 아래의 터널을 지나니 바로 백운호수의 풍광이 나를 사로잡는다.
호수 윗쪽의 외가와 호수 아래로 한참을 내려가야 있던 덕장초등학교를 한 학기동안 다녔었는데...
당시 나를 참 많이 사랑해주셨던 ,지금도 성함이 기억나는 차 화자 선생님,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립다.
호수를 비잉 둘러싼 도로를 달려 상류로 올라가서 1급수가 흐르고 있는 계곡을 끼고 오르고 올라 천주교 공동묘지가 있는 가파른 경사에 진입한다.
가파른데다 울퉁불퉁하고 움푹움푹 패인 곳 투성이인 위험한 길이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또 올라섰지만 아뿔싸!
걸어서만 다니던 그곳은 오토바이조차 건널 수 없는 끊어진 곳이었다.
막바지로 올라서 보려다 거의 전복사고가 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슬쩍 넘어지는 것으로 모면하고,
워낙 가팔라서 내려오기도 위험천만이었지만 조심스레 내려와서 한 블록을 더갔는데,
최저기어 포지션인데도 올라서질 못하고 ,연료도 거의 다 돼간다.
근처엔 주유소도 없는데...
포기하고 계곡참에 세워두고 계곡에 발 담그고 과일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바로 밑에서 도란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빼꼼히 들여다보니 친구인 듯한 두 남자분들이 손짓까지 하며 내려오셔서 라면 좀 드시라고 한다.
과일 도시락을 챙겨들고 내려가서 많이 드시라고 사양을 하고 나의 과일 도시락을 펼쳐드니 신기해하신다.
그걸로 아점 식사를 대신한다고요?하면서...^*^
눼에~하면서 동석을 하고 각자의 식사를 하면서 대화의 꽃을 활짝 피운다.
술이라도 한 잔 하시라고 권하시지만 술을 못마신다며 정중히 사양을 하고....
중머리를 한 나의 모습에 다소 의아해하시며 불무도라도 하시느냐고 물으시기에 술술 서로의 이야기까지 풀어놓게 됐고,
나의 명함까지를 전하며 기념촬영까지 한다.
한 시간 가까이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나서 헤어지고,배낭 하나만 메고 올라선다.
지난 추석 때 동생이 조카들을 데리고 다녀갔다는 걸 알기에 ,하지만 낫을 못 챙겨서 벌초를 다하지 못한 건 알고 있었지만 ,
톱과 손으로 큰 장애물은 거의 제거를 해뒀다.
묘 바로 밑의 덤불에서 예전에 말벌집을 발견했던 기억이 있어서 손대지 말라고 했기에 거기만 정리하고,삐죽삐죽 솟은 잔디만 깎아주면 될 것 같다.
훌훌 벗어던지고 미처 처리하지 못한 잡초를 호미로 처리하고,낫으로 삐죽삐죽 솟은 풀들을 베어주고,
분사용 살충제를 뿌리며 묘 아래의 무성한 덤불을 정리하니 ,어머니가 예뻐졌다.
제단에 앉아 저멀리 보이는 백운호수를 조망하며 땀을 식히고,간식을 한 후 ,1급수로 샤워를 하려고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저절로 자생하는 밤나무들에서 떨어진 밤도 주워서 까먹고 도토리도 몇 개 주워들고 나려오는데,어랏!아직까지도 두 친구분들이 안 가셨다.
담배를 나눠 태우고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신 후 그들이 즐기는 계곡 바로 옆의 다른 실계곡으로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후련하게 묵은 때를 벗겨준다.
끝으로 두 손을 모아서 만든 종지에 계곡물을 받아 마시고 그들과도 헤어져 ,서두른다.
이제부턴 온전한 추억 여행이다.
예전에 정겨운 돌담으로 둘러쳐졌던 외가가 있던 자리부터 찾았는데,작은 외삼촌께서 옛집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리시고 ,
무리하게 라이브 카페를,유명 건축가까지 고용해서 대규모로 지은 후 뒷감당을 못하셔서 결국은 경매로 넘기게 됐고,이름도 FOX에서 피카소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의 상당부분을 간직하고 있던 곳인데...참 아쉽다.
하지만 어쩌랴?
아쉽게 바깥에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호수의 나머지 반 쪽을 둘러싼 길을 달려준다.
지금은 나보다 한 살 어린 이모가 운영하는 아리조나란 카페도 한참 바쁠 시간대여서 그냥 눈으로만 인사를 하고 지나쳤고 ,
호수 둑 위로 천천히 오토바이를 몰면서 ,어린 시절 뛰어놀던 모습을 떠올려본다.
지금도 이리 까마득한 높이의 둑 위에서 무서운 줄도 모르고 뛰어놀았다니...
둑 아래의 수로에서 고둥을 잡아 신발 주머니 그득 들고 가서 외할머니에게 삶아달라고 하면
할머니께선 귀찮게 이런 걸 왜 잡아왓느냐시면서도 삶아 주시면서 맛있게 먹는 손자들을 사랑스럽게 봐주셨는데...
부엌 뒷문 쪽에 있던 우물가에 핀 돌나물로 물김치를 담궈 주셨는데,어린 입맛에도 어쩜 그리 감칠맛 나고 맛이 있었던지...
커다란 안 방에서 대청마루를 건너면 있는 건넌방의 아궁에서 밤새도록 가마솥에 엿을 고아주시던 것도,
한겨울에 쌀뒤주에서 더듬더듬 찾아주시던 홍시 맛도,
아궁이와 호롱불 밑의 화로에서 구워 먹던 근밤,군고마도 잊을 수 없는 맛이긴 하지만,특별히 그 돌나물 물김치가 지금도 그립다.
저수지 상류에서 친구들과 피라미를 잡아서 어른들을 졸라 국수를 넣고 끓여먹던 기억들까지 삼삼하다.
둑위를 달리며 참 많은 광경을 떠올리는 추억 여행도 잠시 ,둑을 벗어나 다시 고천동으로 넘어간다.
다시 지지대 고개를 넘어서서 수원으로 접어들었는데,어랏?!프랑스 참전 기념비 건너편에 지지대고개 쉼터가 새로이 조성됐다.
하지만 마음은 이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억들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서둘러 이목동의 노송지대로 접어든다.
삼풍농원인가 하던 곳에서 딸기를 한소쿠리 사 들고 연못 안의 정자로 들어가서 친구와 이야기꽃을 피웠던 것 같은데,누구였지?가물가물~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는 당시 SK란 회사의 정문 앞에 살던 한 살 연상의 ,끝내 사모로 그치고 만 누이가 살던 근처를 지나면서 속으로만 '이 경이!'하고 속삭여봤다.
파장동을 지나 내가 다니던 모교가 있는 정자동을 지나치자 수원 화성의 화서문이 앞을 딱 가로막듯 그득하게 눈에 차온다.
북문에서 서문인 화서문까지 형성된 공원에서 참 많이도 놀았었는데...
고등학교 다닐 땐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 행사를 우리학교에서 했고,수원 여고생들이 함께 해줘서 성곽을 둘러싸고 행진을 하며 설레곤 했었지?
인천에서 전국체전을 할 땐 원정까지 가서 행사를 하기도 했었는데...
화서동 쪽으로 달려 새로이 단장한 도청을 끼고 돌아 영복여고에 다니던 당돌한 아이들과 무덤가에서 밤이 늦은 줄도 모르고 속삭이다
통행금지 위반으로 역전 파출소에 끌려갔던 기억도 슬쩍!^*^
서장대까지 올라서고 ,남문인 팔달문에서부터 시작한 계단의 끝인 작은 암문 앞에서 남문쭉을 굽어보고...
강 감찬 장군을 만나러 산책로를 눈치보며 내려섰는데,강 감찬 장군 동상도 매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무슨 사당 같은 게 새로 조성돼 있다.
아쉬움...
여자친구들 꼬시러 자주 애용하던 팔달 약수를 지나쳐서 친구들과 방 하나씩을 세얻어 살며 세일즈를 하던 교동을 지나친다.
안양 호계동에 살았던 영복여고를 다니던 동갑내기가 수원 교도소에 수감된 친구를 면회하러 왔다가 들러줘 여체의 신비를 알려줬던..
그리고 수많은 여친들과의 로맨스가 이뤄졌던 ,심지어는 트리플 다리를 걸치다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던 기억도 있는 곳이다..^*^
사무실이 있던 ,그리고 건너편의 한 업소에서 알게 된 여덟 살 연상의 그녀의 추억을 간직한 중동 사거리를 지나고...
곰이란 별명의 친구가 살던 인계동을 지나서 세류동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군부대와 군인 아파트가 친근해 보인다.
물론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오밀조밀한 동네 분위기는 여전하다.
병점까지 이어지는 예전 도로를 달리는데,부대가 끝나는 데,하천을 건너서 황계동이란 동네가 있었다.
세일즈를 하던 무렵에 알던 여자친구가 살던 동네였는데,비행기가 이.착륙을 하는 활주로와 아주 가까워서 소란한 동네였지만 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불러내서 하천 둑에 서서 서툰 딮키스를 하곤 했었는데,엄청나게 아팠을 그 행위를 하면서도 아프단 소리도 안 하고 황홀해만 해줬던 그 친구...
나중에 알아채곤 얼마나 미안했던지...
참 착하고 순박했던 녀석이었는데...아마도 지금쯤 행복할 것이다.
병점을 지나 국도 밑 터널로 들어가는 능리를 지나치는데 섬찟해진다.
이 부근에서 화성살인사건이 서너 건 이상 벌어졌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지나쳐서 예전엔 세마대인가 하는 유엔군 참전 기념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고 무슨 성인가로 지명이 바뀐 곳을 지나 ...
본격적으로 오산에 접어든다.
수청리,지금은 수청동인 오산의 초입부는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곳이다.
세일즈 업계에 뛰어들어 교육을 받다가 처음으로 혼자서 필드에 나갔던 곳이 바로 이 동네인데,
그날 두 건의 오더를 작성하곤,뛸듯이 기뻐서 이른 봄이었던 그 때 논두렁을 걷다가 펄쩍펄쩍 뛰었는데,발을 잘못 딛어서 진창에 빠졌으면서도 ,
무릎까지 흙범벅을 하고도 낄낄대며 사무실에 계약서를 흔들고 들어갈 수 있게 해준 곳이기 때문이다.
그 때 사무실 차장님이 불도우저란 별명을 지어주셨다.
따분한 교육을 뿌리치고 나가보겠다고 나선 ,내성적이기만 했던, 덜 준비된 내가 그럴 줄 몰랐다며 지어주신 별명이었다.
되든 안 되든 밀어붙이고 보는 놈이라며 지어주신 별명이었던 것이다.
원동,궐동 등을 지나치며 당시 수원에서 여기까지 와서 집집마다 들러 아이들의 전집을 팔기 위해 하루 백 가구 이상 방문을 목표로 뛰어 다니던 곳이다.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첫 오더 생산지란 상징성에 의미를 두고 찾곤 했던 오산이다.
어느새 평택에 접어들었고 송탄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등학교 때 여기서 유학을 온 녀석들이 자기들은 국제도시에서 왔다며 장난처럼 으쓱대곤 했었는데...
미군부대가 있어서 외국인들이 많다는 걸 에둘러 말한 것이었고,우리들은 그런 녀석들을 신나게 두들겨패주며 미군부대가 무슨 국제도시냐며 깔깔대고 웃었더랬지...
바로 나오는 평택 시가지...그리고 역전.
생전 처음 가게에 고용됐던 평택 출신 직원과 함께 찾은 홍등가의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기억이지만 ,당시로선 왜 그리 달콤한 유혹이었던지...ㅠㅠ
그리고 결혼초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연상의 사모의 대상이 살던 곳이 가까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와 살고 있다.
물론 알고만 있을 뿐 왕래는 하고 있지 않지만...
예전 1번 국도였던 ,지금은 뒷길이 돼 버리고 만 철로 옆의 2차선을 느긋하게 달려 경기도에서 충남으로 넘어온다.
전화로 예약한 두 고객을 찾아 수리를 해 드리고,드디어 1번 국도에 접해있는 나의 성으로 돌아온다.
가슴이 터질듯한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고,헤어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으로 절망까지 하게 만들었던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뼈를 묻고 싶어하는,
나의 제 3의 고향인 천안시 직산읍이다.
21년째 살고 있으니 ,제 1의 고향인 안양에서보다,제 2의 고향인 수원보다 ,훨씬 오래 살고 있으며 ,
내 평생 가장 큰 열매를 안겨주기도 한 곳이기에...
가정을 경험하게 해줬고,사랑스러운 두 딸을 선물해준 곳이기도 하며,나의 노후대비책을 마련해준 곳이기도 하기에...
그리고 비로소 행복하단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곳이기에...
또한 생전 처음으로 빚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머물던 곳이고 ,사회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곳이기에...
시위도 처음,기부도 처음,자원봉사도 처음으로 이곳에서 하게 됐다.
그러고보니 나의 추억은 거의 1번 국도를 따라 형성돼 왔다.
나의 살던 고향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이란,1번 국도변의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엔 안양 유원지,지금은 안양 예술공원이라 불리는 곳이 나의 살던 고향이다.
나의 아버지가 그곳 석수동에 있던 미군부대에 카튜사로 근무하다 어머니를 만나 나를 낳으셨으니...
2대 째 인연이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끝까지 아름답진 못했고 ,너무나 슬픈 ,모두가 슬픈 피날레로 1대 인연은 끝을 맺었지만...
열 시간 가까이 이렇게 숨막힐 정도로 쉬지 않고 나의 추억여행은 이뤄졌고,지금은 엉덩이가 배겨서 묵지근 하지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는 송구영신 여행으론 그만이었다.
다음 번엔 고향까지 조금 더 연장을 해서 오토바이든,자전거든, 차든 닥치는대로 이용을 해서 상황에 따라 완결판을 이뤄가야겠단 생각을 해본다.
자정도 훨씬 지나있고,1급수로 씻은 게 아까워서 오늘은 양치질만 하고 그냥 잠들어야지...^*^
그래도 더럽다고 인상 쓰는 사람도 없고 ,혼자인 게 이래서 참 좋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