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694

아이들은 부모의 삶의 영수증


BY 미개인 2015-02-23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함으로써 출발하고,나이가 들면서 부모를 평가하며,때때로 부모를 용서하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아일랜드.극작가.소설가.시인.단편 작가.프리메이슨 회원.

날카롭고 약삭빠른 재치로 유명하며 ,런던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사람으로 가장 성공한 극작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로 평가된다.

퀸즈베리 사건이라는 유명한 재판으로 인해 극적인 몰락을 겪게 되고,'막중한 풍기문란'으로 투옥된다.

학자인 H.몽고메리 하이드는 '막중한 풍기문란'을 비역죄에까지 이르지 않은 동성애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평생 돌아가지 못했으며,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뇌수막염에 걸려 사망했다.(위키백과)


나는 어려서 부모님을 사랑해 본 기억이 없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 본 기억도 거의 없다.
그리고 부모님이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본 기억도 거의 없다.
그렇게 열세 살을 먹었고,열세 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살던 집에서 쫓겨 나 동생 둘을 데리고 머나먼 전라남도의 순천으로 갔다.
오갈 곳이 없어 무작정 역전에서 코딱지 만한 식료품점을 하시는 할아버지 댁에 찾아간 것인데,
당신들께선 낮이고 밤이고 편히 엉덩이를 붙일 만한 곳도 없는 ,남의 처마밑의 공간에 얼기설기 판잣집을 짓고 살고 계셨던 듯하다.
밤이면  손바닥 만한 쌀창고의 빈틈을 비집고 겨우 잠을 청해야 했고,날이 밝으면 학교로 가거나 어디든 나가서 배회를 해야 했다.
하루 중 대부분을 역전에서 어슬렁거리며 오지도 않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해가 지면 슬그머니 기어 들어가 밥 한 술 얻어먹고 
가게 문 닫기만 기다리다가 쌀자루 틈에서 잠을 청했다.
이후로도 더럽고 치사한 학창시절을 겨우겨우 마치고 ,진학시킬 의사도 없이 대학엘 가라시는 아버지의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공돌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으로 치면 개사료로나 쓰는 라면부스러기를 끓여주는 기숙사에서 자며 라면박스를 만드는 공장에서 2교대로 두 달 근무하고,
비로소 ,7~8만 원 정도의 월급은 받은 날로 다 써버리는,대책없는 고졸 사회인이 되었다.

이후로도 수많은 전직과 방황,시련을 겪으며 10여 년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사람 꼴을 갖추게 되고,
결혼이란 걸 해서 화목한 가정의 가장이 되리란 원대한(?) 포부를 실현시켜 보고자 했는데,
자신들을 목표로 삼고 충실하는 것이 지나친 듯해서 부담스럽고 싫다며 놔달라고 해서 천신만고 끝에 손발을 다 털어버리게 됐는데,
초대받지도 못한 작은 딸의 졸업식장에 가서 아는 체를 했다가,"내 졸업식 망치지 말고 가라!"는 문자를 받고 쓸쓸히 돌아와야 했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에서 주최한 ,'안산 단원고에서 팽목항까지..'라는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도보행진에 참여했다가 ,
뜻밖에도 그 행렬 안에 들어있는 작은 딸을 보고도 외면을 당해야만 했던 쓰라린 아픔을 선물받고 중도포기를 하고 말았다.
울컥했었지만,화도 나려고 했었지만,내가 그랬음을 알고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30여 년 전에 내가 딱 저랬었고,폭군이기만 했던 나의 아버지도 나를 풀어놨었던 것이다.
그래...스스로 앞가림을 해가는 너희들이 자랑스럽고,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어하는 것까지 나를 닮아있으니 고맙다고 감사하게 됐다.
지금처럼 나보다 조금씩만이라도  낫게 살아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그러다 언제든 손을 필요로 하거나 ,물질적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빚을 갚는 심정으로 참다운 도움을 주도록 대비하며 살아가리라.
녀석들이 외면을 하려 기를 써대면서도 ,신기하게 30여 년 전의 내 모습을 베낀 듯 살고 있는 걸로 봤을 때,
지금의 내 모습이 녀석들의 30년 후의 모습일 수도 있으니 함부로 살지도 말고,진정 행복하고 당당할 수 있는 삶을 영위해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된다.
어영부영 살려고 했더니 ,30여 년 간격을 두고 평행이론 정도의 룰이 적용되는 걸 보곤 ,이 삶도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워하면서 닮아가는 게 부모자식 간이라지 않던가?
그래서 자식들을 부모들의 삶의 영수증이라고 말을 하는 걸 게다.
지금 자식들이 잘 살고 있다면 내가 열심히 잘 살았기 때문일 것이며,불행하다면 그것 역시 부모인 우리들이 잘 못 살았고,잘못 가르친 탓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어른 노릇하기가 제일 어렵다고 하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식들이 행복하길 바란다면 나 스스로 행복해지려 애써야 할 것이며,
자식들이 세상에 기여하며 보람차게 살길 바란다면 내가 먼저 그런 삶을 살아가려 애써야 할 것이다.
자식들이 뒤늦게라도 공부를 해서 학문적 업적을 쌓길 바란다면,내가 나이 탓이나 해대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공부를 해서 업적을 쌓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부모의 노력에 자식들의 특단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부모의 전철을 밟는 징크스를 벗어나게 될테니...
그래,나를 외면하고 미워하더라도 제발 나와는 다른 멋진 생을 살아다오라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일 뿐!

나는 엄한 아비였을지는 몰라도 무책임한 아비는 아니었기에 녀석들도 무책임한 삶을 사는 지탄의 대상으로 살진 않으리라 감히 자신해 본다.
그리고 큰 돈은 못 벌었지만,그렇다고 남에게 사기를 치거나 손을 벌리고 구걸을 하는 삶은 살지 않았으니 떳떳할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비열하게 부나 명예를 구걸하며 살지 않을 생각이니 또한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다.
이혼을 하시고,제대로 가르치지도,책임지지도 않았으며,끝까지 살아계시지도 않고 사고로 돌아가셨으며,결혼을 하는 것 까지도 못마땅해 하셨던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으면서도 ,다신 안 보리라 다짐을 했었다가도 ,잘 자란 자식들을 데리고 다가가서 마음을 열고 감사하게 된 나이었으니...
이혼은 했으되,바라지도 않는 종자돈을 쥐어줬고,아직도 학업을 계속한다면 후원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왔고,
늘 관심을 갖고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며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하고 있고,무안을 당하면서도 좋은 일엔 나서서 축하를 해주고 있고,
죽지도 않고 건강하게 살아남아 있으니 ,녀석들도 얼마간 철이 들면 ,멋지게 성공을 해서 나타나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신들 어른들이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고자 했으나 우리들은 꿋꿋이 자수성가를 했습니다!라고 따져오면,
그래,미안하다며 안아주고 서로를 용서하는 의식을 치루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믿음이 있어서일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가면서 ,빨리빨리 나이가 먹고 싶다.

어제 한 지인이 나이듦에 대한 의견을 물어오신 일이 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난 평생 나이가 드는 것을 싫어해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가지라도 더 보고,더 읽고,더 실천하면서 더 성숙해져 왔고,
과거의 파릇파릇했던 젊을을 추억하기는 했으되 왜 그땐 이러질 못 했지?하면서 후회를 해 본 적도 거의 없다.
심지어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 하고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했었던 것까지 후회를 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서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됐으니...
스무 살 무렵에 행동철학으로 낙이불음(樂而不淫)을 정하곤 ,제법 잘 따라온 덕분이지 않을까?
즐겨라,삶을...철저히 즐겨라!하지만 빠지지 말아라!집착하지 말지어라!고 스스로에게 쉼없이 외치며 살아오면서,
더런 몹쓸 짓을 하면서도 거기 빠지지 않고 그 짓으로부터 뭔가 깨달음을 얻으려 애써온 덕분인 것 같다.
쾌락을 누리면서도 거기 집착하지는 않으리라 다짐을 하며 잘 콘트롤 해 왔는데...
아뿔싸!
지고지선의 목표로 삼았던 가정생활에 와서 집착을 하고 ,파경을 맞게 되다니...
인생 참 재미있는 것 같다.

기쁨이든 슬픔이든,고통이든 쾌락이든 시간과 함께 다 가버리고 만다.
남는 것은 '나' 하나뿐인데,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일 뿐인데,사람들은 그런 소중한 '나'를 포기하고,남의 시선으로만 살려고 하는 경향이 짙다.
부화뇌동(附和雷同)엔 천재적 기질들을 발휘하면서 ,정작 중요한 자아추구(自我追究)엔 인색한 것이 그 증거인데...
말로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으니,모든 부모나 어른들이 본보기가 되고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