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릴케--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오스트리아. 시인.작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왕국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였고,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낸 후 육군 유년 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중퇴했다.
프라하 ,뮌헨,베를린 등의 대학에서 공부하였고,꿈과 동경이 넘치는 섬세한 시를 쓴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명하다.
20세기 최고의 독일어권 시인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수 크리스토프 릴케의 죽음과 사랑의 노래 '등을 발표한 1기를 거쳐,
뮌헨에서 만난 러시아 여인 루 살로메에게 감화를 받아 러시아 여행을 떠난 후,러시아의 자연과 소박한 슬라브 농민들 속에서,
'나의 축제를 위하여','형상 시집' 등을 발표한 2기,조각품처럼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우주와 같은 시를 지으려 한 3기,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3년 이후의 4기로 그의 인생은 구획된다 할 수 있겠다.
2기에 루 살로메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그녀를 위한 시집 '그대의 축제를 위하여'를 써서 혼자서 간직하였다 한다.
1902년 파리로 건너가 조각가 로댕의 비서가 돼 모든 사물을 깊이 관찰하고 규명하는 능력을 길렀다 .
3기엔 시집 '신시집', '로댕론'을 발표했고,파리 시대의 불안과 고독,인간의 발전을 아름답게 서술한 '말테의 수기'를 발표했다.
4기엔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를 발표하였는데,
그의 모든 작품들은 인간성을 상실한 이 시대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부르짖음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편지로 교류를 하였는데,당시 삶과 예술 ,고독,사랑 등의 문제로 고뇌하던 젊은 청년 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낸 열 통의 편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독일은 물론이고 미국에서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위키백과)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들을 하지만,추억을 살리기 위해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이 시각은 가히 충격적이랄 수 있다.나에겐...
돈벌이도 시쿤둥,맛난 음식을 먹는 것도 시쿤둥,사랑스러운 이성과의 사랑에도 시쿤둥한 본인으로선 참으로 충격적인 깨달음을 주는 말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내게 추억은 ,차고 넘친달 만큼의 많고 많은 추억은,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고,생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추억과의 삶은 남들이 보기엔 지지리 궁상으로 보여질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론 그 어떤 때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나이듦이 요즘처럼 좋았던 적도 없었던 것이 릴케의 저 이론의 타당성을 증명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두 딸들에게 평탄한 삶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미안했었는데,이젠 그러지 않으련다.
더런 신나기도 했고,더런 너무 엄해서 바들바들 떨게까지 한 일도 있었지만,
나의 경험으로 미뤄보건데 그 정도는 나중에 커 보면 추억거리가 돼 줄 뿐이란 걸 알기에,
더군다나 개떡같은 성격의 아비가 아닌 어미와 살게 됐다는 것도 이후의 추억 쌓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나보다 몇 곱절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감히 장담을 해 본다.
오늘도 두 눈 꽉 감고 가게문을 닫아 걸고 서울까지 가서 또 한 번의 추억을 쌓고 왔으니...
친일 인명사전을 만들기 위해 모금을 할 때 후원을 하면서도 ,그리고 오마이 뉴스와 인터뷰를 하면서도,그리고 한 회원의 권유를 받으면서도 망설이기만 하다가
최근에야 가입을 한 민족문제 연구소의 정기 총회에 참석을 해 본 것이다.
일부러 서울역에서 내려 시청까지 걸어가면서 촌놈이 서울여행도 살짝 맛보고,대단할 줄 알았던 민족문제 연구소란 단체의 초라한 모습에
내가 뒤늦에서야 관심을 가져서 그런 것이기라도 한 양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총회 내내 결의를 다지면서 임했고,
식후에 소박한 식단을 마련해준 주최측의 배려로 많은 사람들과 동류의식도 원없이 느껴 봤다.
친일 매국노 척결과 정의로운 세상에의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의 오프라인 모임이 참으로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이 경험 또한 추억이 되어 더 많이 나이가 들었을 때 ,나이듦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줄테니...
가능하면 지역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회원모집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형편에 따라 후원도 열심히 해서 후회없는 추억으로 가꿔가리라.
나는 5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전국방방곡곡에 정말 많은 추억을 쌓아두고 있다.
그리고 당장 내일이라도 현생활을 은퇴하고 ,또 다른 삶을 찾아가게 된다면,흩뿌려둔 추억들을 찾아다니며 곱씹으며 알차게 살아온 만큼의 시간을 보낼 자신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추억이라고 아련하게만 생각하는 것들을 당하던 당시엔 반드시 즐겁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고 싶어서 찾았던 곳도 있었지만,지금은 그런 곳이 아름답게 기억이 되고,의미가 돼서 다가와주고 있다.
결론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피튀기게 치열하게 살아보라는 것이다.
여차하면 추락할 것 같고,죽을 것 같지만,절대 추락도 하지 않고 죽지도 않는다.
악으로 깡으로 산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살아내고 나면 ,그런 것들이 나중에 추억이 돼서 고칼로리의 식량이 돼준다는 것이다.
살도 안 찌고 ,오히려 성인병 등을 방지해주는 좋은 보약이 돼 준다는 것이다.
나이듦에 저항하기 위해서 처절한 심정으로 수술대에 눕는 바보짓을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안 들면서 당당하게 나이가 들어가고 싶어질 것이다.
추억을 만들어가는 심정으로 삶을 살아가노라면 반드시 결과도 좋을테고,세월을 거스르려는 추한 모습을 연출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둔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그 멋진 추억을 먹고 살기 위해서 나이를 마구 먹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
내가 많은 명언들을 곱씹어 봤지만,오늘의 명언은 개인적으로 정말 압권이다.
어려서 암울했고 불행했지만,그런 와중에도 잘 버텨냈기에 ,고생을 한 흔적들이 아름다운 추억이 돼서 나를 살게 해준다.
젊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맨 기억이 대부분이지만,그래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덕분에 고스란히 추억으로 부활해주고 있다.
막판에 결혼이란 크나큰 모험을 치루면서도 별로 좋아본 기억이 없던 나날이었지만,잘 버텨낸 끝에 지금은 아이들과의 추억들이 나를 먹여살려주고 있다.
풍성한 추억 먹거리들이 있다 보니 늘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흡족스러워서 ,삶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굳이 있는 척,잘난 척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흡족하고 행복하니 50대 돌싱남이 돼서야 비로소 사는 맛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릴케의 저서를 읽어야 할 책에 올려놓고,가까운 시일 안에 꼭 구해서든 도서관을 뒤져서든 꼭! 접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