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뜻을 지닌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
--쉴러--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쉴러(1759~1805) 독일.고전주의 극작가.시인.철학자.역사가.문학이론가.
괴테(1749~1832)와 함께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일컬어지는 그는 하급 군의관의 외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전공해 목사가 되려 했다.
그런데 영주인 카를 공작의 명령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다 의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슈트트가르트에서 하급 군의관이 됐으나,학창 시절에 몰래 문학 작품을 탐독하며 습작을 했었고,
철학교수 아벨의 권유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그로선 충격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그런 것들이 밑거름이 되어 첫 작품 '군도'를 자비로 출판하게 됐다.
이는 독일 귀족 계급의 횡포에 대한 반항적 작품이었는데,이 작품이 성공적인 초연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됐다.
의무관으로서 집필활동을 금지당하자,공작의 저술 금지령을 피해 만하임으로 도주했고,
도피생활을 하면서 'Fiesco의 반란', '간계와 사랑'을 썼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바탕으로 하여 ,1800년대와 1848년 혁명기의 독일인들의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787년,네덜란드 독립사를 연구,인정을 받아 1789년 예나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가 된 후 ,
미학,철학,역사에 대한 논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고 역사와 미학 강의를 하기도 했다.
1794년부터 괴테와 교분하여 함께 '크세니엔'이라는 시집을 내기도 했는데,이들은 자주 만나 문학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공동 작업을 했다.
1799년부터 만년의 희곡 창작의 시기에 들어가 '발렌슈타인'3부작,'오를레앙의 처녀', '빌헬름 텔'등의 대표작을 써서 괴테와 견주는 대작가가 됐다.
희곡의 대부분은 운명과 대결하는 의지의 힘을 묘사한 것으로 그리스 고전극 정신의 재생을 지향하고 있다.
평소 신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폐질환으로 바이마르에서 사망했다.
2005년에는 쉴러 사망 200주년을 맞아 독일은 전국적으로 '쉴러의 해'라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위키백과)
영국의 수필가이자 정치인인 조셉 에디슨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일하는 사람,사랑하는 사람,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쉴러는 뜻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 했다.
2년 여 전 나는 위의 에디슨의 말을 갖고 행복의 비결에 대해서 곱씹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쉴러의 저 말을 듣는 순간,띵~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일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사랑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희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쩌면 위의 말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는 요건을 다 갖추고도 욕심을 부리느라 행복하다 생각하지 못하는 걸 꾸짖은 걸지도 모른다.
파랑새의 일화가 말해주듯,우린 가진 것으로부터 행복하다 느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가지지 못한 것에의 열망이 눈을 가려버려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쉴러의 말을 듣고 나의 경우를 돌아 보니 뜻을 갖게 되면서부터 진정 행복하단 느낌에 젖어들 수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4년 여 전 이혼을 하고 절망을 해서 자살을 두 번이나 시도했다가 실패를 하곤 ,1년 가까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기운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 올 즈음 '안 철수 현상'을 만났고,안 철수의 빚쟁이론을 들은 후 뭔가 할 일을 찾다가 친일매국노 척결운동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행복을 예감하게 됐고,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스스로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혼을 하기 전에 치열하달 만치 일도 했고,가족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사랑도 했으며,희망도 키워가면서도 미처 느껴 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뜻만 갖고 있으면서 일도 안 하고, 사랑고 안 하며,희망도 갖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겠지만,
뜻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결정적 행복조건임은 분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일이고 사랑이고,희망이며 뜻이라고 하면 거창하게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짚어 봐야 할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이 힘들고 사랑마저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해질 수도 없다는 말이 될테니...
꼭 근사한 직장을 가져야 하고,멋진 이성 간의 사랑을 해야 하며,핑크빛 희망을 가져야 하고,고귀한 뜻을 세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우린 고통에 처해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사실 행복해 하는 나도 어떤 근사한 일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멋진 사랑을 하는 것도 아니고,원대한 포부를 지닌 것도 아니다.
뜻 역시 누구에게 내세울 만큼 크고 원대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을 느끼게 됐으니 하는 말이다.
나는 나홀로 자영업을 하고,종목도 3D의 대표적 업종인 오토바이 수리업을 하고 있다.
사랑도 누구에게나 내보이고 싶을 정도로 근사한 것이 아니라 ,친구들을 사랑하고,애완동물들을 사랑하며,삶을 사랑하고,나라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게 고작이다.
희망도 아주 소박해서 은퇴를 하면 자그마한 트럭 캠퍼 하나 꾸며서 자유롭게 방랑을 하는 것이고,
뜻도 나를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좋은 흔적을 남기고프다는 정도이니 ...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갖출 수 있는 조건들이다.
결국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마음 밑바닥에 소욕지족(少慾知足)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정도의 사고를 깔고 있기만 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1세기 한국인들이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부화뇌동(附和雷同)을 하는 데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남들처럼 살아야 직성이 풀리기라도 하는 듯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주제파악을 하고 분수껏 사는 길로 접어들기만 하면 이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행복하다고 하면 그 사람처럼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내버리기까지 하면서 치달려 봤지만,결과는 어떤가?
결국은 물질만능주의를 넘어서 물신숭배사조까지 만들어버리며 삶의 도구를 목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족함을 누리면서도 ,역사상 최저치의 행복지수를 기록하고 있잖은가 말이다.
이런 주객전도 현상은 삶 자체를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말았다.
채 민주주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한 우리들로선 굳이 역전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산업발달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실현한 모범국가로 언급되는 우리 나라는,
군주시대에나 비교를 했을 때 조금 나아졌을 뿐,여전히 심부름꾼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고,급기야는 폭군이 돼가고 있다.
범죄인 집단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정치꾼들이 집권여당으로 철옹성을 만들고 있으며,
전 한국인들이 도덕적 불감증 환자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보니 그들을 비난하는 것도 무의미해져가고 있으며,
또 이를 악용하려는 슈퍼갑들의 횡포는 날로 극심해지면서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형편인 것인데,
교활하기 그지없는 저것들이 조장한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부화뇌동해온 우리들이 원죄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도리인 효도란 말이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돼 버렸고,
법치주의 국가의 입법기관인 국회가 앞장서서 불법을 자행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의 노동력으로 성장한 재벌과 정치꾼들이 배은망덕하게도 노동악법을 강행하려 협박과 횡포를 자행하고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바로 우리들의 잘못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저것들이 부추기는대로 주착없이 따라오기만 한 우리들의 잘못이고,
자아가, 안 된다고,그러지 말라고 외쳐대는 걸 모른 척 한 우리들 책임인 것이다.
뜻을 가지려면,내 분수에 맞는 뜻을 세워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무엇보다 자아성찰(自我省察)이 절실한데,
지금 우리들이 가장 소홀한 것이 바로 자아성찰이란 데 문제의 핵심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주제 파악 좀 하잔 것이다,분수껏 살면서 얼마간의 여유를 확보하고 ,뜻을 세우는 데 집중하잔 것이다.
그럼 바로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행복의 척도로 삼고 있는 물질이 우리의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최근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는 말이 있다.
정확히 기억하진 못하지만,배고파 하는 나에게 빵을 주는 신부는 천사라 부르지만,왜 가난하고 배가 고픈지를 알려주려는 사람은 빨갱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그리 잘 아는 네가 나 좀 행복하게 만들어달라고 하지 말고,자신이 왜 불행한지를 파악해서 그걸 극복하려 애써가야 할 것이다.
그건 누구도 할 수 없다.바로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