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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善行)이란...


BY 미개인 2016-02-04

선행(善行)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칸트--

 

임마누엘 칸트(1724~1804) 독일.계몽주의 사상가.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르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합리론과 프랜시스 베이컨에서 시작된 경험론을 종합했다.

그는 철학적 사유의 한 시대를 열었으며,그의 인식론.윤리학.미학에 걸친 종합적.체계적인 작업은 뒤에 생겨난 철학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부모 모두 독실한 루터교 경건파의 신자였고,이 교파는 검소한 내적 삶과 도덕법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고,

칸트는 이 교회 목회자의 영향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하게 됐다.

신학과정을 이수하면서 때때로 설교도 했지만,주로 흥미를 느낀 것은 수학과 물리학이었으며,합리론 철학을 체계화시킨 크리스티안 볼프를 연구했고,

동시에 아이작 뉴턴의 과학을 열심히 신봉했던 어떤 젊은 교수의 도움으로 뉴턴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1744년에는 최초의 책을 썼는데,주제는 운동력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학자의 길을 걷고 싶어했지만,1746년 아버지가 죽고 ,대학부속학교에서 조교직을 얻는 데 실패하자 가정교사직을 구해서 9년 간 일했다.

1755년에는 친구의 도움으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고 무급 대학강사가 됐는데,15년 간의 강사 시기는 그가 강사와 저술가로 명성을 얻게 되는 시절이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는 데 두 번이나 실패를 했고,다른 대학들로부턴 교수직을 제안받았음에도 불구하고 ,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지내면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기를 더 원했기에 거절을 했다.

마침내 1770년,그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에서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이때부터 죽기 몇 년 전까지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놀랄 만큼 독창적인 저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미 비판 철학의 중요한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던 1770년의 교수 취임 논문 이후 11년 동안 아무 글도 발표하지 않고 연구에 전념한 끝에,

1781년 '순수이성 비판'을 내게 되는데,이때부터 비판철학의 시기가 전개된다.

 

'순수이성 비판'이 나온 이후 9년 동안 위대하고 독창적인 저술들이 계속 나옴으로써 단기간 동안 철학 사상에서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철학의 나아갈 방향이 정립됐지만,이 책에 대한 해석자들의 비판이 많은 오해를 범하고 있다고 불평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학으로 성립할 수 있는 모든 미래의 형이상학에 대한 입문'이란 책을 냈고,6년 후 개정판을 발간했다.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코페루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하게 되는데,

근대 천문학을 기초한 코페루니쿠스가,겉으로 보기엔 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실은 관찰자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는 마음의 선험적인 원리가 적용됨을 설명함으로써 ,마음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에 따른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가 형이상학을 비판한 것은 결코 종교와 도덕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을 '확실한 학의 길 위에'올려놓으려고 했고,

이것이  비판철학의 진정한 의도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그의 비판철학은 곧 독일어를 쓰는 모든 중요한 대학에서 강의됐고,그는 큰 존경을 받게 됨에도 , 규칙적인 습관과 엄격한 생활을 유지했다.

노령으로 산책이 힘들어질 때까지 루소의 '에밀'을 읽는 데 열중하느라 며칠 집에서 나오지 않은 때를 제외하곤,

'철학자의 산책로'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규칙적으로 산책하는 걸 어긴 일이 없었지만,점점 쇠약해지면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1804년 쾨니히스부르크에서 죽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제 되었다."였다고 한다.

그의 묘비명엔 '더욱더 자주,그리고 더욱더 곰곰이 생각해볼수록,내 위에 별이 반짝이는 하늘과 내 속의 도덕법칙은 더욱더 새롭고 큰 존경과 경외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워준다."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브리태니커)

 

선행은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한다.

선행을 하면 받는 저보다 베푸는 내가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선행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도 찾기 어렵지만,막상 선행을 베푼 사람을 압박함으로써 선행의 권리를 탈취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한 할머니께서 부동산 전부를 기부하고 그 안의 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사시고자 했지만,기부받은 지방자치단체에서 허락하질 않는단 소식도 들리고,

기부한 사람에게 증여세를 과다하게 물림으로써 어이를 상실케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니...

저커버그가  재산 기부약속을 하면서 무슨 재단을 만든 것이 순수한 선행이 아니라 세테크라고 비난을 하는 건 봤지만,

참으로 어렵게 살면서 애지중지하던 것을 좋은 일에 쓰라고 기부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말이다.

친일매국노들의 ,인간적으로 살 권리를 박탈하는 작태는 상상을 초월해서 벌어지고 있다.

절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도록 만들어놓곤 왜 결혼들을 하지 않느냐며 ,결혼 한 번 해서 죽을 고생을 해 보란 식으로 조롱을 해대질 않나,

반역을 하고 매국을 해서 도둑질한 민족재산을 차고 넘치도록 소유하곤, 없는 사람들의 푼돈까지 털어대려 법피아들을 동원하고...

고리대금업자들을 동원해선 재기가 불능하도록 빚의 올가미로 얽어매선 종처럼 부려먹으려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이래갖고선 선행이 아니라 친일매국노들을 죽여버리고 싶어지기만 한다.

하지만 이런 나쁜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저것들의 음모에 휘말리는 것일테니...

더욱 선행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우는 것으로 보기 좋게 복수해줘얄 것이다.

 

'꾸뻬씨의 행복여행'에서 '행복은 의무다!'라는 말로 피날레를 장식하는데,

행복하려면 선행을 베풀고 싶은 의욕에 충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게 되면 행복해진다.'라고 두 말을 버무려 놓아도 좋을 것이다.

많이는 안 해 봤지만,베풂은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걸 아는 나로선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그런데 이 간단한 행복법을 외면하고 ,베풂 대신 강탈을 택한 사람들이 눈이 벌개져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자주 대면하게 된다.

정치권의 대부분이 그렇고,대기업들의 오너란 것들의 면면이 그러하며,각종 기관장이란 것들의 눈은 하나같이 벌개져선 욕망에 들끓고 있는 내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런 그들의 내면을 미뤄 짐작컨데,그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권력자에게 아부를 하고,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가면서 짐승만도 못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현인들은 초야에 묻혀 사는 쪽을 택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열정이 넘치는 젊은 시절엔 얼마간 정의를 이뤄 보고자 의욕을 불태웠다가도 ,인격이 성숙해지면 저마다 초야로 돌아가고 싶어했던 것 같다.

 

아직은 너무 젊기만 한 안 철수라는 나의 스타께서도...

선행을 베풀면서 ,늘 간직해오던 사회에 진 빚을 갚고자 하는 마음을 충족시켜오며 얼마간 행복을 느껴왔을텐데,

어느 날 갑자기 굴러들어온 떡인 '안 철수 현상'으로 각광을 받게 되자 중심을 잃은 것인 걸까?

매우 실망스런 모습을 보이며 지금까지 쌓아온 공덕의 탑을 허물어뜨리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꼴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그리고 조금만 덜 서둘렀더라면 그동안의 공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면서 역사적으로도 획기적이랄 만치 큰 업적을 이룰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은 오도가도 못하게 돼선 '될대로 되라!'는 식의 행태를 보이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한때는 그를 닮고자 ,그의 행보에 동참하고자 열광적으로 매달렸던 적도 있었지만,이젠 마음을 접고 조용히 지내며 나름대로의 선행의 길을 찾으려는데...

 

광복 후 친일매국노들을 척결하려 애국자들이 모여서 이룬 '반민특위'가 모태가 되어 출범한 '민족문제 연구소'의 지역 총회가 어제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독립한 곳인지라 참여인원들이 몇 안 됐고,뺄 수가 없어서 내가 평소 하던 친일매국노 척결 운동과 맞는다 싶어 한 자리를 맡았다.

기분 좋게 뒤풀이까지 하고 와서 더욱 결기를 다지고 있었는데...

오늘 우연히 찾아 온 고객이 ,평소 나의 모습을 눈여겨 봤노라며 공감해주고 응원을 해준다.

차 한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하다가 민족문제 연구소 소개를 하는데,그 고객이 마침 역사학도라는 걸 알게 됐고,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를 하면서 동지애를 확인하게 됐으니...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선물하며 ,반드시 가입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고 ,더할 수 없이 기뻤다.

그 고객도 몰라서 못했노라며 알려줘서 고맙다며 기분 좋게 헤어졌는데...

 

우리들이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소중하다는 건 이런 곳에서 찾을 수가 있다.

누가 보든 말든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는데,슬쩍슬쩍 지나치면서도 눈여겨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

몇 년이 지나서야 확인을 하게 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펄쩍펄쩍 뛰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이게 행복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미 나는 행동을 하면서 기뻤고 ,충분히 행복했는데,한참이 흐른 후 그런 나의 모습을 눈여겨 봐준 사람이 찾아와 확인을 시켜주며 더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주니...

그 기쁨은 그동안 있었던 수고로움이나 ,공권력 등의 딴죽에 상했던 속까지 말끔히 해소해준다.

더군다나 그 고객이 아주 젊어서 더욱 크게 기쁘고 행복하다.

언젠가 연구소 모임이나 행사에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또 얼마나 기쁠까?

정말 생기는 것이라곤 없는 일이지만,생기는 게 없는 선행일수록 얻게 되는 기쁨과 행복감이 커진다는 걸 안다면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기는 것이라곤 없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을 접하면 또 얼마나 행복해지는지를 안다면...

 

그래서 나는 선행을 의무이자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직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겠지만,잠깐씩 해 본 사람들도 긴가민가 하겠지만,

틈만 나면 찾아다니면서 하는 사람들은 이내 수긍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아주 작은 선행부터 베풀어 보시라.

생기는 일이 없는 분야에서 베풀어 보시라,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존감도 생기고,행복하단 느낌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로소 왜 태어났는지를 알게 되고,부모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다정하시면 다정해서,엄하신 분이었다면 또 그래서,소홀한 분이셨다면 또 그런 것이 이유가 돼서 감사하고픈 마음이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번 설명절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찾아뵙고 싶어질 것이다.

모두가 기뻐하는 날일수록 더욱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니...그들을 둘러보고 따뜻한 마음이라도 전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