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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탄 간디


BY 미개인 2018-04-11

1893년,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프리토리아로 가는 열차 안.

한 인도 청년이 난생 처음 방문한 미지의 땅 아프리카를 구경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1등석에 앉았다.

두근거림도 잠시,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다른 백인 승객이 그를 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승무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승무원은 청년에게 화물칸으로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일등석 표를 보여 줬지만 소용이 없었다.저항하던 청년 간디는 결국 기차에서 내쫓겼다.

도대체 왜?

 

1869년 인도 명문가에서 태어난 간디는 영국 유학 생활을 거쳐 스물두 살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엘리트였다.

남아공을 방문한 이유도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이런 노골적인 차별은 처음이었다.뭔가 잘못됐다.그는 분노했고,생각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인도인으로서 자신을 뼈저리게 자각한 밤.스물네 살의 간디는 현실에 눈을 떴다.

 

집안이 유복하고 직업도 탄탄했으므로 그날의 굴욕을 잊고,적당히 지식인층,상류층 행세를 하며 살아도 괜찮았지만 

현실을 깨달은 그는 인도인의 비극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영국 정부는 기차,대합실,공원,호텔,수영장,클럽 등에 유럽인 전용구역을 따로 만들어 인도인의 출입을 막았다.

인도인은 공용 도로를 걷는 것조차 금지됐다.간디는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시작했다.

차별이라는 폭력을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갖고 있는 양심을 깨워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20년 간 남아공에서 인도인의 단결을 이끌며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일깨우던 그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인도의 독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915년 조국으로 돌아와 그가 가장 먼저 힘을 쏟은 일은 조국의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 년 간 기차를 타고 인도 전역을 돌며 슬픈 현실을 목격했다.남은 생은 비폭력 운동과 투옥과 고행과 단식의 연속이었다.

그가 간절히 바란 인도의 독립은 1947년,간디의 나이 일흔여덟에 이루어졌다.

종교 갈등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선 ,간디 입장에서는 불완전한 독립이었다.

둘의 통일을 외치던 간디는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쏜 총알을 맞고 쓰러진다.

그때 이마에 손을 올렸는데,이는,'당신을 용서한다.'라는 의미였다 한다ㆍ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킨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이었다.

스물네 살의 간디를 기차에서 쫓아낸 백인과 승무원은 그 사건이 불러올 변화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모욕을 사적인 복수로 갚지 않고,인류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었다.

 

코레일 사보 기자 손민두.

 

~첫 전철을 타고 아산역에 가서 ,첫 고속열차를 타고 ,

정처없이 발길 닿는대로 가기엔 아쉬운,그래서 그건 조금 뒤로 미루고,알찬 당일여행을 떠나던 길에,

고속철에 비치된 본 잡지의 글을 읽고 독수리타법으로 열심히 베꼈다.

평소 간디 선생을 존경한다면서,얼마나 본받으려 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얼마 안 남은 종착역까지의 시간이지만,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대한 각오를 새로이 다지는 시간으로 만들어야겠다.

 

어느새 희뿌옇던 시야는 확 트였고,

부지런한 사람들에 의해 교차로의 차량행렬은 점점 길어지고 있구나.

썩 열심히 산 것 같지도 않은데,아주 가끔이나마 ,짤막한 것이나마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 .

과연 나는 행복한 사람임을 새삼스레 느끼는 좋은 수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