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을 멋진 연극으로 만났다.
러닝타임이 2시간 40분 정도 되서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멋진 연기와 이야기에 재미있게 관람할수 있었다.
다만,관객석이 둥글에 되어져 있고 뒤로 갈수록 경사가 있어서
뒷 자리에 앉으면 배우들의 목소리가 잘 안들릴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다행히 내가 앉은 자리는 둘째줄이라 배우의 표정까지 생생하게 볼수 있었지만..
2시간 반 넘게 이어진 이 연극은 총 4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19세기 농노 해방령이 이뤄지고 자본주의가 물결치기 시작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라네프스카야 가족과 주변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그려냈다.
라네프스카야(강효성)는 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동산"의 주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파리에서 빈털털이 인채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린 아들이 죽고 사랑하는 남자에겐 버림 받았으며 빚 때문에 별장까지 판 상태로 말이다.
더이상 예전처럼 파티를 열수도,돈을 펑펑 쓸수도 없다.
더구나 그녀의 집안 대대로 살아온 이 아름다운 벚꽃동산이 경매에 넘어갈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라네프스카야와 게으른 오빠 가예프(정상철)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 벌어질거라고 수선을 피우면서도 정작 빚을 갚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시대는 이미 변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다.
돈 한푼이 아쉬운 상황에서도 거지에게 금화를 적선하고,
화려한 파티를 여는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라네프스카야 가족에게 조언을 해주는 사람은 로빠힌(정해균)뿐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라네프스카야 집안에서 농노로 살았지만
로빠힌은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부와 권력을 쌓았다.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잘 적응한 인물이다.
그렇기에 라네프스카야 에게 벚꽃동산을 별장으로 만들어 돈을 벌라고 충고한다.
엄청난 돈을 벌수 있을거라며 빚을 갚을 방도를 알려준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라네프스카야는 그 말을 듣지 않는다.
어려운 말은 질색이라며,로빠힌이 하는 얘기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제대로 듣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자신의 어린 시절이 깃들고,자신의 어머니가 살았던
이 아름다운 벚꽃동산을 잃어버리게 된다.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이다.
쓸쓸하게 짐을 싸들고 떠나는 라네프스카야 가족의 모습은 안타깝고,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한 자들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부하던 그 곳이 자본주의의
물결속에 사라지게 된것이 슬프기도 했다.
그걸 지키지 못한 어리석의 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모습이
희망차 보이기 보다는 위태위태해 보이고 불행해 보인건 나 뿐일까.
라네프스카야의 양녀 바랴(이서림)와 로빠힌의 알듯말듯한 사랑은 아쉬웠다.
좀 더 적극적일순 없었을까. 그들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벚꽃동산이 팔린것에 대해 개의치 않고 오히려 새 삶을 출발할수 있다는게
너무도 기쁜 둘째딸 아냐(양보람).
그리고 개인 교사로 여지껏 대학생 신분인 뜨로피모프(이요성).
뜨로피모프은 인간은 일을 해야 된다 라고 말하고 온갖 열변을 토하지만
그가 바로 말뿐인 지식인의 전형이다.
언뜻 듣기엔 멋있는 말을 하는것 같지만 그의 말과 삶은 완벽히 대치 된다.
무식한 계급 출신인 로빠힌을 무시하는 그의 모습 또한 보기 좋진 않다.
그리고 주인 라네프스카야를 따라 파리에서 러시아로 왔고,
또 다시 여주인에게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말하는 하인 야샤.
하녀 두나샤(박초롱)에게 작업을 걸거도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척 하며
갖고 노는 바람둥이이다.
그녀가 자신 때문에 울어도 대체 왜 우는거냐며 핀잔만 줄 뿐이다.
(내가 본 날은 야샤 역에 박태성씨가 출연했다. 다른 야샤는 데니 안이다.
그런데 처음 포스터를 보고선 데니안 역할이 비중있는 주연일줄 알았다.
하지만 연극을 보니 그게 아니었고, 아무래도 홍보 때문에 포스터를 찍은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농노해방을 부정하고 안좋게 얘기하며 끝까지 이 집에 남은 하인 피르스(류순철).
기력이 쇠하고 귀가 잘 안들릴 정도로 늙었지만 자신의 일을 이행하려고 한다.
평생 주인님을 모시고 살아왔기 때문에,그게 당연한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인으로 살고 있는 피르스 이다.
라네프스카야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보였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그 모습이..
그 외에도 많은 배우들이 나와 이 슬프고도 우스운,
그래서 더 애틋한 벚꽃동산을 빛내주었다.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서 좀 헷갈렸지만,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 혼돈의 러시아 상황을 상상할수 있었고 느낄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라네프스카야가 있었을까. 또 로빠힌이 있었을까.
사라지는 벚꽃동산을 뒤로 하고 떠난 그들은 과연 거대한 변화의 흐름앞에서
잘 적응했을까..
라는 그런 상상을 해 봤다.
내 상상의 끝은 안타깝게도 불행한 것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