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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션] 사랑스러운 우리 동네.


BY 사교계여우 2018-12-23

여러분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곳에 93년도 말부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3학년 말부터군요. 전학오자마자 가을 운동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사는 이곳이 이제 막 '마을'로 조성되던 때이기도 했지요. 서울이지만 서울이라고 할 수 없었던 곳, 서울의 북쪽 끝. 깔끔한 아파트가 들어서긴 했지만, 아파트 바로 옆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비닐하우스들과 기와를 얹은 지붕을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는 아직 7호선이 생기기도 전이었어요. 지금은 하나 둘 아파트가 늘어나 완연히 아파트숲을 이루고 있지만, 전 종종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지대가 낮은데다가 산 바로 밑에 위치한 탓에 장마비가 심하게 오면 집들이 침수되고, 개들이 기와집 위로 대피해 있으면 119 아저씨들이 보트를 타고 와서 구해준 적도 있었지요.

 새집이고 당시 이 근처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저희 아파트단지도 지금은 저와 함께 나이를 먹었습니다. 아파트 외관은 몇 번이나 새로 패인트칠을 해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누가봐도 새로 지은 아파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단지 옆으로 높다랗게 지어진 새 아파트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묵묵히 버티고 있지요. 저희 아파트단지의 배치는 조금 재미있습니다. 16년이나 이 곳에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아파트 단지가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파악하지 못해요.(하긴 매일 같은 곳을 오가는 탓도 큽니다) 111-112-113-114...이렇게 순서대로 나가다가도 갑자기 그 옆에 121이 보이기도 하고 110은 111과 114 사이에 위치해 있는 등, 뭔가 논리가 있을 텐데 한번에 파악하기는 어려운 곳이라 이 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은 동을 찾지 못하고 헤메곤 하지요. 그래서일까요? 가끔 마을을 산책할 때면, '어? 이게 여기있었어?'라고 아직도 놀라곤 합니다.

 전 이 마을이 너무나 좋습니다. 아마 제게 고향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이 곳일 거예요. 제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제가 자라온 곳, 제가 살아온 곳이 이 곳이니까요. 전 제가 자란 이 곳을 사랑합니다. 이 곳에서 보는 하늘을 사랑하고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을 사랑합니다.

 이 마을도 저와 함께 나이가 들었습니다. 분명 아파트들은 늘어나고 인구 역시 늘어났지만 이 아파트 단지는 조금, '쇠락'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아파트 단지 중심에 있던, 'ㄱㄹ상가'는 지금 1, 2층 외에는 폐쇄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만 해도 지하에는 (저희 마을치고는) 큰 마트가 있었고, 그 옆에는 떡집과 쌀집, 고깃집에 야채가게, 과일가게, 만화방까지 빼곡하게 들어서서 장사를 하던 곳이었는데 말이지요. 'ㅎㅅ쇼핑센터'라고 불리는, 아파트 후문쪽에 있는 보다 큰 상가는 'ㄱㄹ상가'보다는 좀 나은 편입니다. 낡은 티는 벗어날 수 없지만 그래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아이러니하게 분명 이 곳은 서울이지만 서울답지 않은 곳이기도 합니다. 우선 '편의점'이라는 곳을 만나기 위해서는 동네를 한참을 벗어나야 합니다. 적어도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야 하지요. 하긴 그럴만도 해요. 저희 동네의 밤은 이릅니다. 'ㅎㅅ쇼핑센터'의 경우 8시면 이미 문을 닫고, 'ㄱㄹ상가'도 8~9시면 슈퍼를 제외한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습니다. 아니, 7시면 이미 다들 문을 닫기 시작하는 걸요. 슈퍼 하나만이 12시까지 불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그거 아세요? 저희 동네는 '정기 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5일장은 아니지만 2주마다, 이 아파트 단지 내에 장이 들어섭니다. 1년에 한 번은 야시장이 열리기도 하지요. 장이 들어서면 조용했던 마을이 활기를 띕니다. 버젓이 상가 앞에서 장사를 하지만 상가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현장에서 막 만들어 파는 두부의 맛은 가히 일품입니다. '먹어보고 맛 없으면 다다음주에 말하세요!'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아저씨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바로 튀겨서 파는 즉석 어묵과 찹살 도너츠는 올 때마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지요. 과일과 야채가게 역시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장은 단지 물건만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장이 열리면 아파트 단지에 꼭꼭 숨어있던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고, 사람들은 거리 한가운데 서서 그 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니, 깔끔한 대형마트와 백화점을 선호하던 이전의 저는 어디갔나 싶습니다. 나이가 드는 걸까요. 나이가 드는 것이 이런 거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 동네는 잘 사는 동네도 아니고 교통의 요지고 아니고 다른 동네들에 비해 잘난 동네도 아닙니다. 하지만 참 여유롭고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보면 감탄이 나올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곳은 아니지만, 두 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이곳은 눈을 들면 얼마든지 산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초/중/고를 나온 아이들은 그 산을 매년 방문하다시피 합니다. 학급 야영 때나 학교 소풍 때면 빠지지 않는 코스거든요. 그래도 조금은 유명한 산이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게는 그저 동네 뒷산일 뿐입니다. 정말로 동네 친구들 만나면 가끔 산책이나 가자며 슬슬 오르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요. 만약 제게 누군가가 '너희 동네가 왜 좋은데?'라고 묻는다면, '우리 동네는 조용하고 자연이 아름답고 사람들도 좋고 무엇보다 여유로운 곳이니까'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긴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자기가 사는 동네가 제일 여유롭고 편안한 곳이겠지요.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치고는 공기가 청명하고 거대 도시 특유의 조급함을 이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동네에서는 뛰어다니기보다는 슬슬 걷는 것이 더 어울립니다. 뛰어다니는 것은 천진한 아이들과 명랑한 동물들만의 특권입니다. 아, 그리고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우리 동네는 분명 자연의 축복을 받은 곳입니다. 인간이 살기 전부터 존재해온 두 산자락은 이 마을이 생기기 전부터 이곳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자연을 우리가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국민학생이었을 때도 초등학생이었을 때도, 중학생이었을 때도,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저희는 꾸준히 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쓰레기를 줍고, 강에 나가 강 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예전에는 '똥물'이라고 불리던, 탁하고 냄새나는 하천이 지금은 맑고 시원하게 흐르는 걸 보면, 어쩐지 뿌듯합니다. 비라도 한껏 퍼부어서 강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그 곳은 바로 새들의 놀이터가 됩니다. 목이 길고 하얀 황새(?)들이 강 위를 뛰어다니며 먹이를 잡고, 겨울이면 야생 오리 무리들이 꾸벅꾸벅 졸기도 합니다. 몇몇 오리들은 물 위에서 자맥질을 하기도 하지요. 저희 동네가 정말 좋은 동네라는 증거를 대 볼까요? 저희 동네 비둘기들은 날씬해요(두둥!) 저희 동네 비둘기들은 날아다녀요(두두두둥!!) 

 풍요로운 자연만큼, 이 곳은 사람들도 여유롭고 넉넉합니다. 제가 이 곳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저와 살아온 슈퍼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분식점 아주머니, 문구점 아저씨는 아직도 절 마냥 어린 학생으로 봅니다. 그 분들은 저희 강아지를 보면 웃으면서 이름을 불러주고 먹을 것을 나눠줍니다. 옆집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아파트 단지지만, 가끔 동네를 산책하다보면 그냥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겨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게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어쩐지 큰 범죄는 우리 동네와 참 안 어울릴 것 같아.'라고요. 분명 이 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문제는 많습니다. 가끔은 이웃끼리 싸움이 날 때도 있고, 몇 년에 한 번은 저 집에 좀도둑이 들었다며 수군거리는 아주머니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쩐지 살인, 강간, 강도같은 큰 범죄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게 제 동네는 아이들이 부모님의 눈을 벗어나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 도로에서 차들이 학생들이 탄 자전거를 위해 기꺼이 기다려주는 곳이거든요. 가끔씩 함 사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구경을 하곤 합니다. 시끄럽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습니다. 실은 저도 몇 번이나 구경나간 적이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저희 동네는 동물들과 살기 좋은 곳이기도 합니다. 저희 강아지와 함께 동네 마실을 나갈 때면 사람들은 웃으면서 '이리와! 이리와!'라고 부릅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들의 스타가 되고, 벤치에 앉아 약주를 한 잔씩 나누는 할아버지들께서는 안주를 나눠주려고 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경계하기 마련인 길고양이들이 살기에도 그리 춥지만은 않은 동네가 이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슈퍼부터 오솔길 절반까지를 오가는 슈퍼냥은 저와도 인사를 나눌만큼 사람과 친숙한 고양이입니다. 사람을 겁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애교도 부리며 먹을 것을 얻어먹곤 하지요. 가끔 새벽에 일 마치고 돌아올 때면 슈퍼 앞에서 쪼그리고 있다가 절 알아보고는 '냐앙~'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 위에서 그루밍을 할 정도로 태평하기도 한 녀석입니다. 슈퍼 뒤에는 검은 고양이와 노란 고양이가 살고 있습니다. 볕이 좋을 때면 나무 아래서 둘이 껴안고 낮잠을 즐기기도 합니다. 동네 주민 누군가가 꾸준히 깨끗한 물과 먹이를 그릇에 가득 담에 상가 뒤에 놔 두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 곳 근처에 가면 종종 고양이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새벽에 출근하다가 고양이 두 마리가 경비실 문을 툭툭 두드리며 숫제 먹이를 내놓으라고 냥냥 울어대는 걸 본 적도 있네요. 고양이들이 그럴 수 있는 이 동네가 전 참 좋습니다. 지하철역 앞 작은 공원에 가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나온 사람들을 종종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도 고양이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만난 점잖은 턱시도 고양이도 여기 살고 있지요. 다가가서 제가 '안녕? 반가워요.'라고 눈으로 인사하자 '안녕하시오? 날이 좀 춥지 않소이까?'라고 정중하게 답하는 신사 고양이더군요. 나무 사이에서는 참새, 맷새, 그리고 이름모를 회색 새들이 날아다닙니다. 강 옆에 펼쳐진 꽃밭에는 노랑나비, 흰나비, 표범무늬 나비등이 나풀나풀 날아다닙니다. 이 녀석들은 겁도 없어서 가끔씩 사람들 사이를 술래잡기 하듯 날기도 합니다.

 그래요. 우리 동네는 서울에서 가장 큰 구 안에 있지만, 동시에 가장 가난한 구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보건소가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보건소 실습 때 선생님들이 말하셨습니다. 보건소 사업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사람들 역시 보건소를 많이 이용한다고요. 독거노인도 많고, 기초수급대상자도 많은 동네지만, 그만큼 그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네, 전 우리 동네가, 참으로,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스럽습니다.
 이 곳에서 살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이 곳을 걸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오늘의미션] 사랑스러운 우리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