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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교의 흔적을 찾아서


BY dongsil112 2007-10-19

모교의 흔적을 찾아서
 
 저녁에 첫동창 모임이 열린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만나는 어릴적 친구들의 모습이 선연히 떠오른다. 어제 광주공항에서 남편의 배웅을 받으며 탑승 수속을 마치는 동안 내내 그 시절의 아른한 추억을 짚어본다. 비행기는 어느새 굉음을 일으키며 짧은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핸드폰이 울린다. 우도로 발령받은 영양교사 고민희가 약속대로 마중 나왔다는 전갈이다. 여자 동창 중에선 유일하게 독신을 고수하고 있는 우리동네 친구이다. 미모와 능력을 모두 갖춘 탓에 적당한 짝을 만나기가 어려웠는 지 되려 혼기를 놓쳐 버렸다. 아직도 삼십대니 사십 먹기 전에 시집을 갈 것인가 말것인가가 동창들사이에서 초유의 관심거리이다. 서회선 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우린 그간의 적조했던 소식들을 나누며 내일 있을 동창 모임에 대한 기대를 확인하게 된다. 북제주군 한경면 두모리로 향하는 승용차의 드라이브는 경쾌하기만하다. 이번 고향 방문이 단순히 동창 모임 참석차 온 것을 그녀는 내내 남편 잘 만나서  라고 단정한다. 하긴 남편의 동의없이 아이 넷 딸린 삼십대주부가 왠 동창모임을 참석할 수 있단말인가. 그것도 비행편을 이용해야 갈 수 있는 섬지방을.
 
 다음날 동창모임에 앞서 당초 계획했던대로 모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발걸음이 사뭇 긴장된다. 학교가는 길은 아직도 그 방향그대로 큰 도로의 한쪽 인도를 따라 20분가량 쭉 걷기만 하면 된다. 살레모리를 지나고 마침내 두모와 신창의 경계점에 다다랐다. 그곳에 번듯한 면사무소가 아직도 턱하니 버티고 있다. 우리가 성인이 되는 첫단계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던 곳이다. 철부지 시절도 다가고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 자라서 나라의 일꾼으로서 언제어디서든 의무와 책임을 , 또 권리를 누릴수 있다는 증표의 하나인 주민등록. 대한민국 국민임을 입증하는 증명서를 수첩에 고이 간직하고 다니게 된 것이다.  
 
 면사무소 건너편 집이 바로 진춘옥의 집이다. 지금은 그 오빠가 "명품치킨"간판을 내걸고 운영하고 있다. 그시절 우린 학교 끝나고 집에 오는길 중간쯤에 있던  일반 구멍가게보다는 규모가 제법 큰  춘옥이 집을 기억한다. 춘옥인 졸업할때까지 늘 빨간 가방을 들고 다녔다. 아마도 크기로 만?1학년 입학할때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그 빨간가방에 "멋쟁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던 걸로 기억된다. 목소리도 크고 눈이 커서 초롱초롱 빛이 나던 아이. 언젠가 우리반 여자아이들이 모두 춘옥이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고 갔던 기억이 난다. 생일날엔 명이 길려면 국수를 먹어야 한다시며 어머님께서  끓여주신 국수를 먹었던 생각이 문득난다.
 
 이발소를 지나니 이번엔 양애경이의 집이 생각난다. 옷가게를 운영하시던 부모님이 큰딸인 애경이의 이름를 따 붙인 "애경양품"이란 간판이 눈에 선하다. 역시 지금은 그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 있다. 고리나네 집으로 가는 골목길은 여전히 오르막길이다. 리나네 집에서 함께 밤을 새웠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처음으로 우표를 사서 침을 묻혀 정성스레 붙인 편지를 부치기도 했지. 바로 그 우체국과 나란히 마주 보는 건너편이 우리 학교 정문이다.
 

 
 지금은 인근의 중학교와 합병해서 "신창초.중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1983년 졸업할때까지만해도 "신창국민학교"로서 중학교로 진학하는 인근 초등학교 중에 가장 규모가 큰 학교였다. 전국의 시골학교가 다 그렇듯이 인구 감소로 인근에 있던 초등학교들은 다 없어지고 중학교마저 폐교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초등학교와 합쳐진 것이다. 교문은 없어졌지만 학교의 입구에 서서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다정한 이소를 주는  돌하루방은  인자한 얼굴로 오랫만에 찾은 방문객을 맞는다.
 10미터가 넘는 이길 양편엔 나무들이 무성하고 가운데 화단엔 아름드리 와싱토니아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화단에 줄지어 심어놓았던 진홍빛 사르비아가 우리학교의 교화였다. '타는 마음, 불타는 사랑' 등의 꽃말에 어울리게 진홍빛 고운 꿈을 키우던 시절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화단이 끝나는 지점에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고 새긴 책읽는 소녀상이 그 때 그시절 그대로 독서삼매경이다. 추억이 서려있던 교정을 거닐고 있으면 옛날 그시절 그 애들이 눈에 어린다. 운동장이 휜히 드러나고 학교 건물이 가까워진다. 6학년 2반 시절의 교실이 보인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음악교실로 바뀐것 같다. 당시 음악선생님은 6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셨던 양귀순 선생님이시다. 학교오는 길에 신창약방을 운영하셨던 선생님의 부모님은 얼마전까지도 약방문을 지키고 계셨는데 오늘 보니 간판이 없어졌다. 80년대만해도 양귀순선생님의 지도하에 있던  합창단과 합주반은 학교의 명예를 빛내곤 했다. 전도대회의 화려한 수상경력도 경력일뿐더러 어버이날 면민회관에서 노인위로 잔치에, 뿐이랴  한라문화제에 초대받아 KBS방송국에 출연까지 했던 기억은 참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기억이 아닐수 없다. 나는 당시 리코더를 불었는데 TV에 비친 모습 중에서 리코더연주자들이 연습때보다 더 멋있게 연주했다면서 칭찬받았던 기억이 난다. 합주반 중엔 김영희가 긴 생머리에 단정한 모습으로 가장 큰 악기인 실로폰을 연주 했다. 운동회날 양맹필이 지휘봉을 휘드르면  "천국과 지옥", "페르이아의 시장" 등 명곡을 연주하며 술 달린 빨강파랑 제복을 입고 행진을 했다. 운동회날이면 만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애육산이든 과목원이든 향나무그늘 아래든 어디든 인파들로 북적대곤 했다. 활기 넘치던 운동장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건 없지만 건물은 많이도 변했다.
 

 
 건물 안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화사한 색상의 밝은 이미지가 그려진다. 새롭게 리모델링 된 구건물과 새건물을 아치형 차양이 쳐진 다리형식의 건물로 연결해 가운데지점에 알루미늄판  미끄럼대를 설치한 게 독특하다. 벽에 둥근 구멍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한다. 역시나 1998년에 북제주군 건축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기록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예전엔 저학년 교실이 있던 건물편에 교무실을 마련한 모양이다.
 

 
 
 과목원과 백엽상이 있던 자리엔 건물을 늘리면서 좁아졌고 화분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과목원은 각종 수목들을 관찰하며 가꾸고 과목마다 명찰을 달아 놓았던 기억이 난다. 백엽상 앞엔 기상대와 풍향계가 있고 잔디밭이 제법 푹신했고 연자방아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도로와의 경계을 이룬 돌담이 지척이고 곰솔나무와 백일홍이 나란히 그늘을 드리우고 있을 뿐. 철 지난 사르비아를 거기서 만날수 있었다. 교화로서 명맥을 유지하기엔 좀 초라해 보일정도로 시들어 있었다.
 

 
 본관건물을 빠져나오고 향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운 동상이 눈에 어린다. 늘 푸르고 그윽한 향기를 간직한 채 군자같이 품위 있는 나무가 어서오라는듯 미풍에 손을 흔든다. 푸른 꿈을 간직한 어린이들의 교정에 제격인 향나무가 오랜 세월을 오롯이 견디며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너른 운동장을 내려다본다. 예전엔 동상을 세운 단이 높아서 이순신장군을 우러러보곤 했지. 나라사랑 그림대회를 할적마다 장군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그려보곤 했다. 그림 잘 그리던 이창언이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크레파스로 열심히 그림그리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몇걸음 옮기니 눈부신 황금빛의 단군상이 위엄있게 옥좌에 앉아계신다. 한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IMF이후 어려운 경제로 인한 총체적 난국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우리 민족의 중심가치와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1998년에 전국의 각 학교및 공공장소에 369기의 '통일기원국조단군상'을 세우게 되었다는 설립연유를 밝히는 안내판이 함께 있다.
 또 바로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낯 익을 동상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교무실 현관에 붉은 글씨로 '반공방첩'이라고 쓰여진 모습이 오버랩된다. 강원도 두메산골의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사연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지 않은가. 당시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공산당이 싫기만 했던 시절이었던가 보다. 교육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지금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 교정에 서 있어도 그 사연에 대해서 아는 어린이는 몇 없을 것이다. 시대가 많이 흘렀다. 아홉살 소년이 책보를 든 채 언제나 그 모습그대로 서 있다.
 국방색을 둘러쓴 이승복 어린이 동상을 지나고 좁은 샛길 옆에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가 횃불을 높이 쳐들고 있다. ' 3.1절의 환갑을 맞는 기미년 새 아침에 유관순 누나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79년에 세웠다'는 문구를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홉살, 즉 2학년때에 이 동상이 세워졌던 모양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옛 일인 게다.
 기증자 명단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바로 졸업반이던 시절,  6학년 담임 신국남 선생님. 전형적인 네모난 미남형 얼굴에 쌍거풀 눈매와 언제나 자상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나의 초등학교시절 마지막 은사님이시다.   
 

 
 높은 동산을 지나 다시 아래로 몇걸음 그늘이 드리운 숲길을 걸으면 곧 애육산이다. 고무타이어로 총총히 박아 금을 그어놓은 씨름경기장이 나온다. 아마도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나왔음직한 경기장 모습을 모방했는지. 둥그렇게 돌계단이 놓여져 있어 거기 앉아서 씨름경기든 닭발싸움이든 제편을 목터져라 응원하곤 했다. 그러고보니 어렴풋한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초등학교 막 입학해서 김정심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주먹쥐고 손뼉치며... ' 같은 조무라기들의 동요를 배웠던게 바로 그 자린가 보다. 경기장 옆엔 자리를 옮긴 소규모의 동물원이 있다. 캥거루 사자 호랑이 .... 청소시간이면 동물상 하나에 한사람씩 메달려 폼을 잡곤 했다. 이젠 이 동물상들도 그때만큼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는 것 같진 않다. 페인트칠이 벗껴진채 뒤켠으로 밀려나 있다. 언젠가는 철거돼겠지라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실내에서의 생활만을 즐기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이런 야외놀이들이 하나씩 퇴색되어 간다.
 

 
 입학하던 해의 1학년 교실자리에 이젠 현대식 건물이 우람하게 들어서 있다. 애육관이란 현판이 건물의 용도를 그대로 말해준다. 실내체육시설이 갖춰져 있을 것으로 애육관건립추진과정에서의 부지매입의 애로사항을 비석으로 새겨놓았다. 이 건물바로 옆이 후문이다. 예전에 후문도 정겨운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시멘트길로 포장이 되어 있다.  늦잠자서 지각할때는 후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선 쏜살같이 교실로 내닫곤 했다. 어린시절의 때가 묻은 곳은 어디나 정겨운가 보다.
 

 
 다시 후문을 돌아서 운동장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학생들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철봉에 메달려 놀고 있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학교 전경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맞은 편 경계 지점은 돌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고향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현무암의 바람구멍조차 정겹다. 운동장 맨 끝 경계지점에서 바라본 모교 전경은 아득하기만하다. 교무실위치가 애육산쪽으로 옮겨갔고 중학교와 함께 쓰니 규모도 커졌고 색상도 밝고 환해져서 비록 시골 학교지만 아름다운 학교의 전경임에 분명하다.
 

 

 
 
 
 어릴적 모교를 나오며 오른편에 새로 생긴 유치원을 본다. 요즘아이들은 유치원에서 기초 학력은 다 배우고 입학하니 초등학교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알림판에 '9월은 독서의 달'이라고 쓴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서 단 학교신문을 대하니 그렇게 반갑고 정겨울수가 없다. 어린시절의 푸른 꿈이 새록새록 아로새겨지는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각박한 현대를 살아가는 중년들은 지금 돌아볼 일이다. 추억을 더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과거는 이미 지난 시간이지만 미래를 계획함에 있어 그 터전이 되며, 현실의 안온한 생활에 한가닥 희망을 선사받을 수도 있다. 조용한 시간에 홀로 모교를 찾아가 보라. 20년 또는 30년전 잃어버린 시간들이 오롯이 되살아나는듯하지 않겠는가.
 


고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