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한국에 갔다와서 홍역을 치르나 보다. 등치는 산만한 사람이 3일 연타 감기몸살에 힘들어하고, 아파도 먹는 것 하나만큼은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인데, 오늘은 점심도 힘들다고 거른다.
반쪽이 아프다 하니 다른 반쪽인 나도 온전할 리 만무하다. 어째 허리가 욱씬거리고 하는 일 없이 피곤하다. 독일에 막 처음 온 사람처럼 신고식을 철저하게 하는 것 같다. 그나마 아이들은 힘들지 않아 보이니 다행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매실차에 질좋은 꿀을 듬뿍 넣어 남편에게 마시게 했다. 점심까지 걸렀으니 아무리 소화가 안된다 해도 속이 출출할까 싶어 한국에서 공수해온 생마를 믹서에 갈아서 건네주었다. ‘마’라는 식물이 워낙 소화를 촉진한다고 들어서 기대감을 갖고 말이다.
삼십 여년 이상을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 토양에서 자란 음식이 몸에 맞을 것이다. 이것저것 공력을 들인 탓에 저녁 무렵부터는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입에서 ‘어허 둥둥’ 판소리라도 나올 것 같다.
그러고보니 일 주일 전 이맘 때만 해도 서울에 있었는데....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눈물이 핑 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성호르몬이 강화되어 남성화된다는데, 난 나이가 들면서 더 약해지고 눈물이 많아지는 것 같다. 물론 남성호르몬과 눈물과는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저녁밥을 지으며 찬장을 열어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들을 보며 친정엄마의 손길을 새록새록 느껴본다. 그 종류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것 같지만... 다시금 입속에서 되뇌어보아야 성이 찰 것 같다.
돌김, 미역, 오징어, 한과, 장어 말린 것, 북어채, 고춧가루, 참기름, 들깨가루, 볶은 검정콩, 잔멸치, 각종 국산차(호박차, 오미자차, 대추차, 율무차 등등), 홍삼사탕, 고추장, 매실차, 친정부모님이 해주신 우리 부부를 위한 한약, 참깨... 어떻게 저 많은 것을 싣고 왔을까 새삼 놀라기도 하지만 먹을 게 많아 든든한 마음에 배시시 웃음이 터져나온다. 이 음식들이 다 떨어지는 날, 다시금 어김없이 한국을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그래서 빨리 탕진하고 싶은 욕구가 출렁거린다. ** 우리 부부의 건강을 위해 친정부모님이 해주신 한약 ** 내 머리가 잘 빠진다며 손수 볶아주신 친정엄마표 검정콩 ** 내가 좋아하는 국산차 ** 독일 겨울밤을 밝힐 오징어들~~ 내 다리 내놔~~ ** 주전부리들... 홍삼사탕과 검정깨 한과~ 내친 김에 방의 장롱을 뒤져보았다. 선물용과 내가 가질 것을 구분해둔 탓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한국물건들이 주인을 향해 복종의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
고가의 화이트크림은 못샀지만, 그런대로 만족감이 드는 화이트 케어제품과 유난히도 석회가 많은 이곳의 물에 여지없이 혹사당하는, 내 머리를 위한 헤어 매니큐어제품도 보인다.
게다가 약해지기 쉬운 아랫도리를 위한 좌훈제, 얼굴 마사지 제품, 팩 등도 고개를 내민다.
얼굴 팩은 이곳에서 알고 지내는 한인 분들을 위해 든든하게 준비해 왔다. 팩 제품은 한국제품이 훨씬 친밀감이 느껴지고 피부에 더 좋은 것 같아 팩 제품은 한국 것을 고집하게 된다. 한국 여성들이 워낙 아름다움에 관심많으니 더 나을 법도 하다.
액세서리도 든든하게 챙겼다. 친정언니들이 선물해준 것도 있고, 내가 예뻐서 구입한 귀걸이와 목걸이 등도 있다. 특히 아는 언니 덕분에 남대문 도매시장에서 판매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한 탓에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얼마 전에 큰 아이 선생님에게 귀걸이를 선물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물론 예의상 기뻐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부터 줄곧 그 귀걸이를 착용하고 다니는 것을 보니 예의상만은 아닌 듯해 보인다. ** 고가의 제품은 못사도 그런대로 만족하는 화이트케어제품 ** 앙증맞아 구입한 남대문 도매시장표 액세서리들 둘째 딸의 유치원 선생님에게는 동양의 이미지가 느껴지는 볼펜과 동전지갑을 선물했는데, 고맙다는 인사가 없다. 이곳의 문화가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맘에 안드는 것인지 하여튼 선물을 하면 반응이 영 함흥차사다. 생각해보니 큰 딸 선생님도 받을 때만 인사했던 것 같다.
그래도 선물은 언제나 받을 땐 기분이 좋을 거라 생각하며 받는 사람의 심정을 상상하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선물을 주면서 칭송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그건 이미 내 마음에 불순물이 있다는 증거일테니까.
선물을 줄 때는 그냥 무조건적으로, 그래서 주는 사람이 기분이 업 되는 것만으로도 당연 보상이 된다고 보아야 할게다.
갑자기 부엌과 장롱 서랍이 풍성한 것을 보니 가을걷이를 막 끝낸 농부마냥 마음이 벅차오른다. 한국의 정을 모두 보듬아 안은 듯 푸근해진다. 비록 독일에 살고 있지만, 난 영원히 한국사람으로 살게 될 것 같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 살더라도 말이다.
어제 끓인 미역국을 오늘까지 주구장창 먹어도 질리지 않고, 김치 하나만 있어도 밥 한그릇 감사하며 뚝딱 할 수 있다는 거. 걸인의 찬이라도 내가 사랑하는 그 무언가에 의미를 둔다면 가장 행복한 거라고... 오늘도 난 베를린 속 한국사람으로 한국을 먹는다. 사랑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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