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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야지요. 육아도~


BY 대전에서 2000-09-01

학교 다닐때 쓰잘대기없는 공부들도 성적을 위해서, 또 안혼날려고 내지는 경쟁심에서, 혹자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등등의 이유로 밤도 가끔 새워보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아이키우기에 대한 공부는 우리 부모들 너무나도 안하는거 같아요. 아이를 연년생으로 둘 낳고 6살 7살로 키우면서 모성애라던가 부성애같은건 타고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지요. 부모노릇 할려면 제대로 해야하지 않겠어요..???!!!

저도 한때는 아이들을 때렸었어요. 근데 때리고 나면 그 죄책감때문에 견딜 수가 없더군요. 제가 읽었던 책을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을 올립니다. 읽어보셔요.

부모역할 배워지는 것인가(Parent Effectiveness Training in Action)
Thomas Godon, Judith Godon Sands 지음

아이들을 키우면서 부모의 역할이라는 게 공부하지 않고는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연유로 이런 부모역할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읽은 후 아이들과 나의 관계는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인식해야할 것 두가지는 먼저 아이들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부모는 자신이 초능력을 지닌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즉, 아이들은 나이가 어리더라도 그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지닌 (그것이 처음에는 미숙하게 보일지라도 스스로 해결하다 보면 원숙하게 해결할 밑바침이 된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이며 그것을 부모가 인정해줄 때 스스로의 행동은 스스로 책임질줄 알며 주변을 배려할 줄 아는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부모는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말고 부모가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잘잘못을 가려주기 전에 아이에게 부모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아이도 그것을 왜곡없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부모는 역시 사람이다. 스스로 인정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일이 항상 일관적일 수가 없으며 자녀의 문제를 모두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할 필요가 없다. 자녀가 문제를 지녔을 때 부모들은 종종 뛰어들어 대신 책임지고 해결하려고 하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에는 스스로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부모의 도움을 요청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스스로 해결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위한 세부적인 기술이 몇가지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기술 두가지가 반영적 경청과 나-전달법이다. 즉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단지 부모는 그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이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잡는 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거의 예외없이 아이들이 문제를 상의해올 때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해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하는 잘못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되집어 질문을 하거나 자녀가 필요로 하지 않는 정보를 제공한다거나 하는 것은 대화를 방해할 뿐이다. 따라서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술은 메시지를 포함하지 않고 다만 자녀가 말한 메시지를 반영해 주거나 다시 자녀의 말을 확인하는 종류의 언어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반영적 경청이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들은 것을 다시 확인 함으로써 정말 자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고 또 자녀의 말을 경청하였음을 나타내줌으로 소극적 경청과는 다르다. 그러나 숨겨둔 목적을 지니고 반영적 경청을 하면 대부분의 경우 제대로된 의사소통에서 실패하게 된다. 반영적 경청만으로 아이는 스스로 사고하여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아낸다.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밖에서 놀고 싶어하는 7살짜리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반영적 경청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 넌 정말로 밖에서 계속 놀고 싶어하는구나.
자녀: 네, 너무 재미있어서 친구들만 남겨두고 집으로 가고싶지가 않아요.
어머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도중에 그만두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반영적 경청)
자녀: 그래요.
어머니: 이 문제에 대한 좋은 생각이 없을까?
자녀: 그러면 저녁을 조금 나중에 먹겠어요. 아니면 제 저녁을 종이도시락에
담아와서 여기 놀이터에서 먹겠어요.


물론 자녀가 다른 많은 해결책을 생각해 낼 수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중요한 사실은, 문제해결의 과정이 자녀의 내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고 이 해결책에 대해서 자녀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영적 경청이 의도하는 목적인 것이다.

경청한 내용을 부모가 싫어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하느냐. 위와 같은 경우에 부모가 너무 피곤해서 나중에 먹는다거나 종이도시락에 담아서 나온다거나 하는 것을 해줄 수 없는 경우에 부모가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나-전달법이다. ‘너는 도대체 왜그러니 말 좀 들어라. 엄마 피곤해 죽겠다.’ 라고 말하는 대신에 ‘엄마가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종이도시락에 네가 먹을 것을 따로 싸는 것이 참으로 힘들단다.’ 라고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를 이야기하라는 것이다. 전자처럼 이야기하는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나타내며 이러한 반응을 듣는 아이는 스스로 자신이 나쁜 아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후자와 같이 이야기한다면 부모는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며, 아이는 엄마가 피곤하구나 라고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부모의 욕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모 자신이 가지고있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다. 즉, 훌륭한 부모는 자녀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내지는 훌륭한 부모란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 하는 부모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부모들은 부모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이기심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의 행동에 대해서 나-전달법을 사용하여 아이의 수용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서 부모가 어떻게 느끼는 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한 경우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부모가 어떻게 느끼는지 현재 부모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이해하게 되면 아이는 그 안에서 스스로 해결책을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려면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완전한 나-전달법은 어떤 것일까.. 일단 자녀가 비수용적인 행위를 하였다면 그 비수용적 행위에 대해서 부모가 어떻게 느끼고 있고 구체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면 부모에게 어떤 영향이 오는지를 제대로 설명해야 한다. 당신이 아이들의 입장에 놓여있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욕구를 만족시킬 만한 어떤 일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해 부모가 ‘네가 하고 있는 것으로 인해 당황했단다.”라고 말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변경시킬만한 자극이 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변경시킬만한 훌륭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녀들의 행위가 우리에게 미치는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데 실패하게 되면 자녀들은 자신의 행위를 변경시킬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이러한 나-전달법은 부부간에 시부모와 며느리간에 친구간에 더 크게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왜곡없는 정확한 의사소통의 한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모든 문제에는 하나 이상의 해결책이 있으며 아이들도 상당히 합리적일 수 있다.


당신의 자녀들은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그들은 당신을 통하여 왔으나 당신으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또한, 당신과 함께 있으나 당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줄 수 있으나 생각은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들의 몸을 가둘 수는 있으나 마음을 가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은 [미래의 집]에 거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곳을 방문할 수도 없습니다, 꿈 속에서 조차도.

당신이 그들처럼 되고자 해도 좋으나

그들을 당신처럼 만들고자 하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인생은 과거로 가는 것도 아니며

어제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Kahlil Gibran 의 '예언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