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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속 상한 날


BY me 2000-11-15

오늘은 괜히 속이 상해서 방금 신랑에게 다다다 퍼 붓고 왔네요.
휴가라고 내려와 있는 사람한테.

근데 점심 때 집에 가보니 애기 토한 냄새, 라면 끓여먹은 냄새, 설거지통인지 쓰레기통인지 알 수가 없는 부엌, 게다가 이것저것 음식을 네가지나 시켜놓고 있는 신랑을 보니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말이죠.
제 입맛에 맞는 것 먹으라고 그랬다는 그 맘은 고맙지만,
그걸 누가 다 먹을 거라고...

저랑 남편은 6년 연애하고, 올해로 결혼 4년째랍니다.
연애랑 결혼 후랑 구구절절한 사연은 남들만큼 비슷비슷한 사연이니까 굳이 나열할 것은 없겠구요,
아무튼 그동안 공부하던 남편이 직장을 잡고 같이 벌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몇달, 근데 혼자 벌때나 둘이 벌때나 살림이 나아지지가 않네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거 다 하라고 제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작은 월급받아서 계절마다 양복사고(이건 어쩔수 없는거죠),
집에 필요한 것도 좀 사고, 부모님께 효도한답시고 턱턱 살림 사다드리고...

그것도 다 좋아요. 뭐, 그동안 혼자 벌어도 잘 살았으니까.
근데 마냥 사람 좋은 남편때문에 가끔 뒷수습이 안되니 정말 답답할 때가 많네요.
이번에도 휴가받아서 여행가자고 큰소리만 탕탕치더니,
막상 휴가내고, 저도 어렵사리 하루 휴가를 냈는데 아이가 덜컥 아프다고 아무곳도 못가고 그 돈으로 시댁에 또 살림살이를 하나 사드렸습니다.

그리고 휴가기간동안 뭐했냐고요?
먹고, 자고, 돈쓰고...그게 다죠 뭐.

이제 오늘 밤이면 또 남편은 올라가고, 우리는 주말부부가 되죠. 아픈 아이 끌고 병원 다니는 것도 제 몫이고, 월급날, 말일날 되면 돈 쪼개서 여기 저기 내고 계산기 두드리는 것도 제 몫, 가까이 사는 시부모님 챙기는 것도 제 몫이죠.
사람좋은 남편은 가끔 내려와서 펑펑 인심쓰면서 그냥 좋은게 좋은거라고 하고 가고는 나름대로 바쁘게 사느라 또 여기는 잊고 지내고, 저는 직장일, 우리집 일, 시댁 일, 발 동동거리며 뛰어다니느라 바쁘겠죠.

주말부부 몇 개월에 는 것은 애기 자고 밤중에 홀짝거리는 맥주 뿐인것 같네요. 통장 마이너스는 늘 그대로이고.

우리 남편,
말도 못하게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고, 나랑 애기랑 많이 사랑해주고, 부모님께도 다시없는 효자에다, 직장에서는 인정받는 남자이죠.
근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드네요.
도대체 난 뭔가...하는.
연애때부터 지금까지 쭉 뒷바라지하고, 애기 키우고, 친정과 시댁에 효도한다고 쫓아다니고...그러다 보니 난 지금 뭔가...하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아침에 눈떠서 잘 때까지 하루 종일 종종걸음치고...
모두 내가 좋아서 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게 아닌데...싶은 것이.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우리 남편은 알랑가 몰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