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한테도 털어놓기도 그렇고 가슴속에 쌓아놓기도 그렇고...
이렇게 글이라도 쓰면 마음이 정리될까요..
많은 사연속에서 하나를 뚝 ?D어내면 앞뒤가 모순이고..해서 더욱 애기하기 쉽지 않네요..
어릴적 가난한 집 자식들이 다 그렇듯이 특히 그중 출중한 위에 형제를 둔 다른형제들이 다 그렇듯..
참고서 하나 마음놓고 사볼수 없었던 것은 그렇다치고,나의 대학입학금으로 다음학기 학비를 내야했던 오빠..
모든 집안 사람들의 압박아닌 압박에 대학을 그만두고 직장을 구했고...
월급한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엄마의 살림에 보탰던 나는...
운좋게 가정 형편이 펴지면서 대학을 가게되었고....
대학을 가서 비로서 모든 근심에서 헤어나고 부모 그늘아래 이게 행복인거야를 느겼는데...
오빠가 직장을 구해준다고 오빠 곁으로오라는 소리에 반갑기만 했는데..
오빠네 집은 그렇듯 편하지만은 않았다...
좁은 집에 조카와 방을 같이 썼던 나는 퇴근후 조카가 어질어 놓은 방을 치워했고 주말에는 어김없이 조카들에게 시달려 쉬지도 못하고,
필요한 책 한줄은 읽지도 못했다.
아직까지 순진한 나는 그래도 오빠가 한번씩 던지는 눈길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아빠가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내가벌어 시집가라고 했다.우리집 형제중 부모 도움받지 않은 사람도 없고,특히 오빠는 모든 경제적 도움을 받았는데 말이다.
거기다 올케는 항상 나를 음식으로 괴롭했다.
내앞에는 항상 시들은 김치조까리가 놓이고,일요일까지 집에서 밥먹으면 눈치를 주었다.내가 사온 과일은 항상 냉장고로 직행하고,시들은 과일은 내밀었다.
먹고싶어서 사온 과일인데..말 못한 내가 병신이지..
내가 전화 안하고 일찍 간날은 어김없이 잔치가 벌어져 있고,집에서 반찬이라곤 식구수 대로 잘라놓은 달걀 말이와 입에 맞지않은 김치찌게가 다였다.
거기다 기념일 생일날전에는 반드시 나를 상기시켜주었다.
그래도 고마웠다. 주위에서 다 재워주고 먹여주는걸 고맙게 생각하라고 했다.
밤마다 나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외출하기까지는 말이다..
객지에서 먹는것도 부실하고 일도 힘든데다 밤에는 아이까지 둘씩이나 맡기니 죽을 맛이었다.
날 제일 힘들게 한건 집에서는 몰랐던 눈치밥이란 걸 먹는 일이었다.
내가 잘못한것도 없는데 오빠는 언니앞에 기죽어 했고, 아이들은 나의 상전이었다.
난 늦게 들어가기 시작했고 주말에 친구를 만났다...
오빠와 언니는 본격적으로 나를 구박하고 눈치를 주었지만, 난 결혼하기로 맘먹었고,결혼했다..
시간이 지나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얼마전 시댁일로 스트레스받아 유산의 경험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5일후 결혼 안한 시숙이 우리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사실 시숙이 온다는 사실을 안 후 부터 나는 거의 모든 신경이 바늘의 끝처럼 곤두섰다.
오빠 집에서 겪었던 일들이 일순간에 몰려왔다.
오빠와 올케와의 불화,나와 오빠네간의 불화,부모님과 오빠와올케간의 불화,나의 여형제들의 분노등등....결혼문제도 두말할것도 없고..
시숙과 처음으로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오빠네집에서 오랜만에 고기구경을 하나보다 잔득 기대했는데, 멀건 국물과 닭뼈 그리고 껍질이 둥실 떠 있는 국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했던 때가 떠올랐다.
오빠네 집에 있을때의 서러움은 한두글로 되지 않으니 상상에만 맡기고 더는 적지 않겠다.
시숙이 오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옛날 올케 언니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나는 시숙이 집에 오래 있지 않기를 바랬다. 옛날 일이 기억나서 괴롭기도 하고 그래서 더욱 신경쓰이기도 했다.
나는 올케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가 아니고, 두번다시는 그런 비슷한 경험도 하기 싫다.
돌이켜 곰곰히 생각해보면 올케의 행동도 이해가되고(아이를 둔엄마입장), 내가 오해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괴로운 기억이고 , 빨리 잊고 싶은 기억이다.
이런이야기 남편한테 할수 있는 아줌마가 있을까? 부모에게 속 시원히 이러더라라고 말할수 있는 딸이 있을까?
우리오빠가 이러더라라고 친구에갠들 속 시원히 털어 놓을수 있을까?
여기에 적힌 글 또한 속시원히 모든걸 다 말한 것은 아니다.
차마 말 못하는 것도 있는것이다. 가슴속에만 갖고 가야할 글이 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