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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리 와 버린 탓이다.


BY 유민 2003-03-16

세자매중 가운데다.
언니랑 동생네는 이름 있는 직장을 가진 남편 덕에
주 5일제가 된 후 주말마다 여행을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고 산다.
물론 전업 주부이고 언니랑 동생은 둘이서 쇼핑 다니며
마음에 맞는 것들은
다 쓰고 산다.
형부랑 제부도 사람이 참 따뜻하고 가정적이다.
일찌감치 자기집 장만했고 시어른들도 무던한 편들이다.

이에 반해 내 처지는 말이 아니다.
절대 언니랑 동생이 샘나는 건 아니다.
단지 여자로서 2003년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30대 중반의
주부로서
그들의 안정됨이 부러울 따름이다.
결혼 7년째 아직 월세 산다.
이 달말 보증금 500만원을 더 올려 주어야 한다.

난 결혼 후 한시도 쉬어본 적이 없다.
둘째 낳기 전날까지도 직장에 출근했을 정도다.
벌어서 뛰어 오르기만하는 월세 보증금을 따라 잡기에 바빴다.
울 신랑은 좋은 학교를 나왔는데도
첨부터 직장이 시원찮았다.
해마다 혹은 계절마다 직장을 옮긴다.
중간 중간 두 세달씩 쉬기도 한다.
계획을 세워서 살 수가 없고 내가 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우리 신랑은 몸이 안 좋다.
거의 어떤 종류의 약이든 달고 산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 같은데
결혼해서 나중에 들으니 울 시어머니가
조산한 탓이라 두 달이 넘도록 인큐베이터 신세를 진 탓이란다.

언니 동생이 부부끼리 자기 생일 기념 여행 가고
호텔에서 바베큐 파티할 때
나는 생일 선물은 고사하고 따뜻한 미역국 한 그릇
먹고 출근할 여유가 없어서
눈물 흘렸다.
남편 출근, 큰 아이 학교 보내고 둘째는 놀이방에 보내고
나 역시 출근해야 하니
국이고 밥이고 전쟁터가 따로 없다.

울신랑은 별 따스함이 없다.
생활이 바쁘다 보니 나도 큰 기대나 보챔 없이
싸움도 없이 그렇게 산다.
선물을 못 받아도 축하의 인사조차 없이 늦는 남편을 기다려도
그전처럼 짜증도 안 난다.

이런 내가 늦은 저녁 무렵 불현듯
묘한 허무함을 느끼게 된 이유가 있다.

옛날 1991년 대학 졸업반 때
쓴 일기장을 우연히 장농 속에서 꺼내 읽어
본 이유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꿈이 많았던가
내가 이렇게 책을 많이 읽었던가
내가 그 애와 이렇게 사랑하며 지냈던가...

그 때의 꿈도, 그 때 읽었던 많은 책들도, 사랑했던 그 애와도
모두 헤어져 버렸다.
단지 만난지 석달만에 결혼한 남편과, 내 분신 둘, 찌들대로 찌든
7년 간의 현실만이 존재해 있을 뿐이다.
속상했지만 눈물도 핑돌지 않았고 코 끝도 찡해지지 않았다.
너무 멀리 와 버린 탓이다.
그런 꿈과 희망과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의아스러울 정도로 놀람만이 있을 뿐이다.

동료 집 장만 집들이 간 남편이 돌아오면
말일에 맞춰 줘야 할 500만원에 대해서
의논해야 할 따름이다.

서글픈 현실이다.
옛날도 그립고
부부동반 여행 중인 내 자매들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