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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끝


BY 백설공주 2004-05-26

이건 정말 하느님의 뜻이라고 밖에 다른 말로 설명이 안됩니다.

저랑 힘들게 살기 싫다고 집나간 지 넉달 된 남편이라는 놈. 아무 대책 없이 객기부리는 거 이제 어쩔 수 없고, 눈에 뵈는 게 없는데 어쩌랴 싶어, 두 아이 내가 잘 키우고 잊고 살아야지 하고 맘먹고 있었더랬어요. 

어젯 밤, 퇴근해서 저녁 먹고 아이들 재우고 보니 자동차 할부구매 내역서가 와 있더라구요, 그 인간 이름으로. 4월말로 직장 그만두면서 회사차 반납하고, 차없이는 못사는 인간이란 거 알기에, 돈없는 주제에 몇백만원짜리 중고차 샀겠거니 했는데, 산타페 신차 36개월 할부로 산 내역서였어요. 온갖 우편물 회사에서 받다가 이제 주소지라곤 집밖에 없으니까, 머리나쁜 인간이 단순히 집주소를 쓴 모양이예요.

아침에 출근해서, 내용을 좀 더 알아보려고, 안내에 적힌 인터넷 주소에 들어가 차구입내역을 확인하다보니, 제가 모르던 그 놈의 개인 메일 주소가 적혀있더군요. 혹시 하는 생각에 회사 메일에 쓰는 비밀번호로 로그인!

세상에, 작년 초부터 여자 5명과 차례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저를 감쪽같이 속이며 이중생활을 한 증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연인관계가 안된다면 친구로 남자.... 일본 출장 와서 무지하게 몸이 안좋은데 너랑 밤마다 통화하며 서로를 생각하고 서로를 느끼고....몇일 전 제주도에서의 일.... 내가 거부당하는 거 느끼면 알아서 갈테니 밀어내지는 마라.... (받은 편지 중에는) 오빠가 나 아파서 열흘 동안 일하러 안나가고 쉬는 동안에도 한 번 안와줄 때 마음이 떠난 거 알았다, 이제 우리는 무슨 사이냐,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더니....

둔기로 머리를 맞은 거처럼 한참을 정신차릴 수 없었어요. 아, 이거였구나. 재작년 말부터 이 인간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고 한 번은 우연히 휴대전화에 '오빠 어쩌구'하는 음성 메시지를 들킨 적도 있었지만 전혀 의심 안했는데, 이제 와서는 내가 저한테 잘못해서 안살겠다고 덤탱이까지 씌우고, 아이들도 안중에 없이 그 더럽게 굴리던 몸둥이와 주둥이로 아이들을 부비고 빨고 했다니.... 

지난 2년간 출장과 낚시를 핑계로 평균 주중 4-5일을 밖으로 돌던 인간. 이거였구나! 그러면서 한 달에 한두 번은 완전범죄를 위해 짐짓 나와 아이들 챙기는 시늉만 하고 결국은 짜증내고....

처음엔 너무 분하고 바보같이 완벽히 속은 내 자신에 화나고, 지 말대로 쉽게 사는 게 인생철학인 한심한 인간 쓰레기를 내가 여기까지 끌고왔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했죠. 그리고,  죽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나는 그렇다 치고, 저 사랑스런 두 딸을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짓을 그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었는지, 심지어는 그 여자애들에게 사랑타령하는 메일 보내고 받느라 로그인 할 때마다 딸아이 생일자로 비밀번호 입력하며 아무 느낌 없었는지, 생각만 해도 돌 것 같아요.

그렇지만, 내가 그놈의 가출이유에 대해 석연치 않아 아무리 궁리를 해도 들여다 볼 수 없던 것이, 너무나도 우연히 그놈의 자동차 구매내역서 한 장으로 인해 이렇게 드러난 것은, 하느님께서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답답해서 만드신 일이 아니가 하고 생각하니, 한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몰랐다면 더 나중에 얼마나 더 기만당하고 이유없는 죄의식에 억울하게 시달렸을까를 생각하며....

이런 더러운 단순 동물을 아빠랍시고 아이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지도 않고, 이번 기회에 세상이 얼마나 내가 모르는 쪽에서 요상하게 돌아가는지도 알게 됐지요.

저랑 연애할 때와 너무나 똑같은 수법과 그 잘난 외모를 무기로  몇 달마다 여자아이들을 바꿔가며 놀아난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한 이 밤 잠이 오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