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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 원하는 것은 육이며 영은 영을 원한다.


BY 펌 2006-09-10

육이 원하는 것은 육이며 영은 영을 원한다. 글:SHINER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법을 주시고 강제 조항을 두어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들이 지키지 못할 것을 다 아신다. 그분이 지키지 못할 것을 아시고 지키라 명하신다면 명하시는 그분이 잘 못이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는 이것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 그렇다면 그 명령을 누가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지킬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떤 자들은 그 말씀을 육으로 듣고 육으로 해석해서 자기가 지켜야 할 말씀으로 오해하고 지키려 노력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율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말씀을 다 지키므로 그분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인들이었다. 오늘날도 어떤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켜서 하나님의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고 성경 말씀대로 지키고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 한다. 그들이 율법주의자들이며 교리주의자들이다. 안식교인들이 이에 아주 철저하다. 먹는 것도 철저히 금하고 날짜를 철저히 지키는 것들이 다 율법사 바리새인들의 짓이었다.


육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명령을 받기를 원한다. 육에게는 명령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맥을 못 춘다. 육은 명령에 따라 죽고 산다. 그래서 명령이 사라지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갈팡질팡한다. 그래서 육에게는 명령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육에게 명령이 없다면 밥을 굶는 것과 같아 아무런 힘이 없다. 육은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둬야 한다. 육에게는 법이 생명이다. 법이 없다면 육은 존재하지 못한다. 스스로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육에게 주어진 법이 바로 율법인 것이다. 율법은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배푸심이었다. 그것이 없이는 저들이 살 수도 유지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켰던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키신다.


누구에게는 그 말씀이 살게 하지만 또 누구에게는 그 말씀이 죽이는 말씀이다. 십자가의 도가 육에게 적용이 되면 죽이는 것이지만 영에게는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은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 육은 생명의 법을 따를 수 없다. 그 속에는 생명을 따를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육은 천방지축 자기 멋대로 살고자 할뿐이지 생명의 룰을 주면 스스로 못 견딘다. 생명의 법 앞에서 살 수 없는 것이 육이다. 그래서 육에게는 육신에 맞는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법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허랑방탕한 것이 육의 속성인 것이다. 이는 육의 근성이 종의 근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은 종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인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육은 주인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주인노릇을 하려 한다. 육은 그 누구에게라도 복종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 그 근성이 그렇고 그 속성이 그런 것이지 이는 잘 되고 잘 못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육이 순종하는 것이 잘 못된 것이다. 육으로는 순종하는 척 하지만 결국은 자기대로 순종하는 척 할 뿐이다. 그러나 영은 주인인데도 주인노릇을 하지 않고 철저히 영에 귀속이 되어 있어 영에게 복종하는 철저한 종이다.


생명은 생명을 따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 굴복이 된 것은 영적인 자들뿐이다. 육은 하나님께 굴복할 수 없다. 그래서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영만이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에게 완전히 굴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육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명을 받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도 못한다. 육은 영을 거부할 뿐이며 거스를 뿐이다. 영과 육은 서로 거스르고 거부된다.


육은 너와 내가 하나이기를 원한다. 하나 되려 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 되려 하는 것이다. 하나라면 하나 될 필요도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육으로 하나이기를 원하는 것이 음란이다. 영은 하나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임을 알아보는 것이다. 영은 하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한 곳으로부터 나왔음으로 원래 하나임을 안다. 하지만 육은 너와 내가 다른데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서로 하나 되어 흩어짐을 면하자 해서 쌓은 것이 바벨성이다. 종교가 바로 바벨성인데 거기는 육적인 자들이 각자 자기 뜻, 자기 소원을 가지고 한 성으로 모아진 것이다. 그 모임이 바로 바벨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육은 여전히 지금도 바벨 성을 쌓는 일에 하나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바벨성이 바로 종교인데 육적인 자들은 종교 조직을 이루는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영은 하나 되려고 하지 않는다. 영은 하나 될 필요도 가치도 없고 바벨 성을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내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이는 아버지 자신이 집이 되시기 때문이다. 영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이다. 영은 오직 아버지가 한 분이시다. 육은 아버지가 각각이다. 그래서 육으로는 모시는 아버지가 각각 다르며 그 섬기는 신이 여럿이고 각각이다. 열이면 열 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육이 섬기는 신들이다.


육신의 생각이 더러운 것이며 육의 계획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러운 것이다. 영이 보기에는 육의 모든 것들이 더럽게 여겨진다. 그러나 육이 육을 보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보이고 흠모하고 따르고 싶고 탐스럽게 여겨져서 먹고 싶고, 함께 붙어 있고 싶고, 같이 살고 싶다. 이것이 바로 음란인 것이다. 음란이란 바로 육이 육을 보았을 때 일어나는 작용이다. 영이 영을 보면 서로 붙어 있고 싶은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임으로 그 존재로 사랑스러운 것이다. 아무 것도 주고받은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오고 간다. 영에게는 시간도 공간도 분리되지 않았다. 여기저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있는 자리에서 서로 만족하고, 존재로 충만하므로 조금도 모자람도 없고, 부족하지도 않고, 의심도 없고, 공허함도 없고, 참 행복이며 참 기쁨이다. 영이 만나면 서로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다. 영은 오직 사랑뿐이다. 거기는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없다. 분쟁도 없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영적인 세계가 바로 그런 곳이다. 그래서 서로 요구가 없고 무엇을 내놓으라고 졸라대지도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육은 항상 부족하여 요구하고 또 요구하지만 채워질 것이 없다. 육의 소욕은 무저갱이라서 채워도 채워질 것이 없다.


육으로 영을 보면 아무 의욕도 없고 욕심도 없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멍청이 바보 같이 보일 것이고 힘이 없는 무능한 자로 보인다. 소유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생명에 대한 갈구와 욕구는 강하다. 그래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을 사모한다. 생명의 양식을 구한다. 영은 오직 하나님만 원한다. 육은 서로 만나서 즐겁지만 이는 참 행복과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히 호기심만 가질 뿐이다. 그 호기심이 사라지는 때에 그 즐거움도 함께 떠난다. 그래서 육으로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은 호기심 때문이지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다. 육은 처음부터 궁금증만 가득하다. 참으로 만나져서 된 결혼이 아니다. 그러나 영적인 결혼은 만나기 전부터 이미 결혼이 되어 있다.


육으로는 오직 호기심이 충만하다가 결혼을 하고나면 호기심이 사라지기 때문에 얼마 있지 않아 매력을 잃어버리고 서로 실증을 느껴 함께 있기도 싫고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각자 자기 삶을 살뿐이다. 그것이 깊어지면 이혼하는 것이다. 육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떠나는 것이다. 성숙은 항상 떠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떠나지 않고 거기 머물러 있으면 썩는다. 육은 떠나야 한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영원한 아버지에게로 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노정인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성숙하지 못한다. 거기 집 짓고 살자고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다. 육은 거기서 즐겁고 행복한 집을 짓고 살고자 한다. “주를 위해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하나는 모세를 위해 여기다 집짓고 삽시다.” 그러나 우리의 영은 떠나자 한다. 나는 육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지지고 복고 엉겨 붙어서 뒹굴면서 함께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날마다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하지만 위에서 부르시는 이가 계시다. “자 내려가자!” 하시는 이가 있다. 그분에게 이끌려 가고 있다. 영은 이끄시는 영이 있어서 이끌려 간다. 영이 없는 자는 위에서 부르시는 영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다. 육적인 자에게는 아예 부름이 없고 다만 짐승같이 그렇게 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