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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말해야겠다 6-딸에 관한 명상


BY 도라지꽃 2008-03-31

 

이제는 말해야겠다 6

-딸에 관한 명상


  엄마는 다섯째 딸을 낳고서 눈이 짓무르도록 울었다. 셋째동생은 정말이지 억세게도 울어대는 아기였다. 아기들은 원래 눈만 뜨면 우는 것이 사는 목적이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좀 너무 한다 싶도록 셋째동생은 정말 눈만 뜨면 우는 아기였다. 엄마는 아기가 울 때마다 애꿎은 우리들까지 싸잡아, “저눔의 간나들 싸그리 한 구디에 끌어묻어뿔라. 아이구, 호랭이가 잡아갈 년들 같으니라고.”하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엄마가 그렇게 딸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을 때마다 나는 언니가 읽고 있던 계몽사 동화책의 어느 한 페이지에 그려져 있었던 그림을 떠올리곤 했다. 어미 여우가 먹잇감을 물고서 새끼들이 기다리는 여우굴 속을 들여다 보는 장면이었는데, 굴 속 짚더미 위에 귀여운 여우 새끼들이 대여섯 마리가 나란히 누워 있는 그림이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 그림 속 새끼 여우들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언니와 나, 첫째동생과 둘째동생, 그리고 여전히 응앙거리며 울고 있는 셋째동생이 순서대로 나란히 드러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잠시, 우리들은 한꺼번에 쌀푸대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엄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우리 다섯 자매가 담겨있는, 배가 불룩한 쌀푸대를 어깨에 짊어지고는 어딘가로 걸어가 꽁꽁 동여맨 쌀푸대의 주둥이를 푼 다음 커다란 구덩이 속에 털어버린다. 우리들은 머리와 다리가 제멋대로 얽히고 말린 채 서로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처박힌다... 여기까지가 상상의 정해진 순서였다. 그런 상상을 할 때마다 생각만 해도 스스로가 가엾어 나는 콧등이 시큰해지곤 하였다. 엄마는, 엄마가 그토록 소원하는 아들을 낳지 못하면 정말 우리 다섯 딸들을 어느 날 갑자기 쥐도 새도 모르게 쌀푸대나 비료푸대에 쓸어 담아 갖다 버릴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위기감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가 하루빨리 아들을 하나 낳고 제발 두 번 다시는 엄마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회사에 일을 나가셨다가 집에 돌아오지 않고 며칠씩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이따끔씩 집에 돌아올 때 그 몰골이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세수를 안 했는지 얼굴은 시커맸고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 부랑자 같았다. 엄마는 월급 봉투를 내놓으라고 아버지를 닦달했지만 아버지가 내민 월급 봉투 속에는 달랑 일원짜리 동전 몇 개뿐이었다. 아버지는 노름에 미쳐 있었다. 한날은 노름을 하다가 판돈을 다 날리자, 그길로 집으로 뛰어들어 다락에 감춰둔 엄마의 곗돈까지 모조리 긁어가기도 하고 엄마한테 부엌칼을 들이대면서 노름에 쓸 돈을 꾸어오라고 밖으로 내몰기도 하였다. 엄마는 미친 아버지한테 감히 찍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이집 저집으로 노름돈을 꾸러 다녀야 했다. 노름을 하느라 회사를 밥먹듯이 결근하자 회사로부터 징계 조치가 내려졌다. 아버지는 회사로 불려 올라가 시말서를 써야 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미친 노름벽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는 갓난쟁이를 업고 보따리를 쌌다. 그리고 집을 나간다는 사람이 겨우 찾아간 곳이 바로 시부모가 살고 있는 두메산골 오두막이었다. 얼마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겠다고 두메를 떠나오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된서리를 맞고서야 겨우 사태를 수습해 갔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4대 독자 외아들이 망가지는 꼴을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리 할 수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지금도 알 수 없으나, 그 무렵 우리집은 도랑 건너 욕쟁이 할머니의, 빨간 슬레이트 지붕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욕쟁이 할머니는 신작로 건너편에서 조그마한 구멍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분의 빨간 슬레이트 지붕집은 동네에서 몇 안 되는 개인 자택이었다. 어쨌거나 아버지가 그 집을 샀고 우리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집이 두 채나 되는, 명목상의 부잣집이 되었다.

  우리가 살다 떠나온 판자집, 회사 사택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만이 따로 기거하시도록 했는데, 그건 아마도 할아버지의 지병치레 때문인 듯 싶다. 할아버지도 아주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의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6. 25 전쟁 당시, 그 회사에서 생산된 광물질은 무기의 원료가 되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할아버지는 그 회사를 그만 두시고 두메로 들어가 화전농을 일구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지병은 숨이 자주 가빠지고 가끔 피가 섞인 가래침을 한 깡통씩 뱉어내야 하는 증세를 동반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주된 병수발은 할아버지가 밤새 잠을 못 이루시고 쿨럭이며 토해 놓은 피가래가 차 있는 깡통을 아침마다 깨끗이 비워 닦아놓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진폐 환자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 그 누구도 할아버지가 앓는 병이 어떤 병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고 있었던 아버지조차도.


 엄마는 적어도 꼬박 하루에 세 번 끼니때마다 시부모의 밥상을 차려 들고 다리 건너 사택집으로 건너 다녀야 했다. 엄마는 진정 지극 정성을 다해 조부모를 모셨다. 삼시 세끼 끼니 짓는 일 이외에도 집안 안팎의 청소는 물론 할아버지의 피빨래와 아버지의 작업복, 우리 다섯딸들의 산더미같은 빨래도 엄마 혼자의 몫이었다. 물론 세탁기는 그 동네에 단 한 대도 없었고 뒷산에서 끌어온 물이 얼어터지거나 중간에 호스가 절단이라도 나면 공동 수도에서 힘겹게 물을 져 날라야 했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노고를 덜어주기엔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너무 어렸고 엄마는 전통적인 효부요, 아내이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드시 아들을 낳아 집안의 대를 잇고야 말겠다는 집념도 엄마의 그러한 가치관의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그때까지 태어난 다섯 딸들은 엄마의 집념, 평생의 유일한 목적인 ‘아들 생산’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좀 더 싸가지 없게 말해, 엄마 인생의 한 맺힌 실패작들이었다고 해두면 어떨까. 그리고 그 실패작 중에서도 가장 졸작이 바로 나, 엄마의 둘째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