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이가 하나인 이유
나의 기억 속에서 나의 젊은 엄마는 언제나 배가 불러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로 인해 담임에게 무엇인가 따져 물을 것이 있어 학교에 찾아온 우리 엄마,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서시는데... 남산만한 배가 먼저 문을 통과한다. 그 때, 나는 엄마의 만삭의 그 모습이 수십 명의 반 친구들 앞에서 왠지 쪽팔렸었다.
그건, 그 당시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에게조차 공공연히 교육되고 강제적으로 이식되고 있었던 정부시책,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든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어찌 보면 교묘하게도 남녀차별에 대한 항거와 남녀평등을 지향한 듯한 그럴싸한 구호까지 옵션으로 갖춘 대단히 잘 짜여진 국가프로젝트라 사람들은 그 시책에 반하는 행위를 했을 때는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죄의식마저 안고 살아야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보건소에 가면 불임을 위한 시술을 거의 공짜로 해주었던 그 시절, 그런 정부시책이 공공연히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고 착한 양들은 국가의 지능적인 산아제한 정책에 부응하여 각자 알아서 두 명이나 좀 많다 싶으면 셋 정도의 자녀를 갖는 집이 많았다. 그런 시국에 무식한(?) 우리 엄마는 홀로 조선 시대의 효부가 되어 와병중인 시아버지가 죽기 전에 손주를 안아보고 가시게 해야 한다는 나름의 불타는 사명감 아래 열심히(?) 아이를 가져야만 했다. 낳아보면 딸이고 낳아보면 딸이고... 다 한구덩이에 파묻어 버려도 시원치 않을 웬수같은 가시나들만 내리 다섯 명... 그 당시에도 지금처럼 초음파 기술이 대중화 되어있었다면 우리 엄마는 아마 모르긴 해도 남녀 성별을 확인한 즉시 어쩌면 수술대에 오르곤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그닥 반기지 않았던 아들 생산에의 엄마의 병적인 홀로집착... 그건 엄마 자신의 일종의 자존심같은 거였을 지도 모른다. 그 시절 우리 엄마처럼, 그렇게 뭐 그닥 대단한 뼉다구 있는 집구석들도 아니면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만 며느리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효의 완성이라고 맹신하면서 젊은 시절을 아들을 낳기 위한 임신과 출산과 지속적이고 고역스런 육아 활동의 반복적 시달림으로 점철해야 했던 가엾은, 구시대의 악습과 독버섯과도 같은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우리 엄마와 같은 가련한 여인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육남매니 심지어 팔남매니 하는, 듣기에도 거북한 용어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고들 있었고 육남매나 팔남매에 속했던 나와 같은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친구들 앞에서 무슨 치부를 드러내고 발가벗겨진 채 조롱을 당하고 있는 듯한 아주 더러운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그런 한 시절도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개나 돼지들이나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낳지, 사람이 무슨 가축도 아니고 여럿씩이나... 심지어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워섬기던, 아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쌈 싸 처먹은 듯한 말을 함부로 뇌까려대던 무뇌아들도 종종 접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우리 엄마는 여섯 번째 출산에서 위대한 과업을 달성했다. 엄마의 평생의 숙원사업의 결실을 보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고야 말았던 것. 엄마는 아무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는, 심지어 이 아들 생산에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가진 유일한 협력자여야 할 아버지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시집 대잇기 프로젝트 숙원 사업 발주 12여 년 만에야 비로소 다섯 번이라는 그 처절했던 실패(?)의 아픔을 딛고 기어이 아들 생산이라는 옹골찬 결실을 완성하고야 말았던 것인데...
그러니 그 아들은 엄마에게 황제이고 다이아몬드고 엄마인생의 전부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 그 아들이 장난감 화살로 누군가의 눈을 맞추어도 화살에 맞은 딸아이가, 황제와도 같은 아들님께서 쏘신 화살이 날아가는 그 자리에 하필 서 있었다는 이유로 엄마에게는 전혀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핀잔을 퍼부어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가시고 귀찮고 점점 더 꼴보기 싫은 짐덩어리 중의 짐덩어리로 느껴졌을 수밖에.
나에게 있어 많은 형제들은 언제나 나를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기회만 있으면 딸들을 한구덩이에 끌어 묻고 싶다고 공공연히 악을 쓰던 엄마의 최 일 순위 희생양이 내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단정짓게 만들고 나 스스로 아주 비참한 존재로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한, 언제나 그 자리에 붙박혀 서서 내가 비집고 들어설 자리 없이 엄마를 가운데 세우고 즈그들끼리 어깨동무를 한 철옹성으로 비춰지곤 했다. 물론 이건 나의 지극히 혼자만의 망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의 내면에서는 이 모든 망상일 수도 있는 지랄같은 들끓는 마음의 전쟁이 실제상황이었다는 것이 지금도 한스러울 따름이다.
나는 사춘기를 지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내가 만약 엄마처럼 어른이 되어 엄마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반드시 한 명만 낳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 한 명에게 나는 나의, 엄마로서의 사랑을 조금도 쪼개지 않고 온전히 그 아이 한 명에게만 올인할 것이라고...
20대 후반에 나의 남편이 내 곁에 머물고 우리의 2세를 떠올리기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을 때 나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었다. 나도 나의 엄마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대상에 대한 지독한 비교와 차별적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평생을 살면서 멍에처럼 지고 가는 엄마에 대한 지독한 외사랑으로 인한 살인적 목마름, 시찌프스가 육중한 바윗덩이를 산기슭에서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 속에 끝없는 영원의 고통을 신음하며 감내해야 하는 것처럼, 죽기 전에는 결코 끝나지 않을 존재의 근원적 슬픔을 내 분신들에게도 대물림해야 할 것인가?
결론은, 결단코, 아니다, 였다.
아버지의 비인간적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상 남자를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학습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성을 사귀지 못했다. 사회에 나와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여겨지는 내 남편을 접했을 때, 나는 세상에 그런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울랑을 남편으로 선택한 것은 순전히 우리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단언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때의 나의 선택은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었음을 나는 자부할 수가 있다. 아직까지 나는 울랑을 만나 가정을 이룬 것에 대해 단 1초라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처음에 사귈 무렵 잦은 다툼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와의 인연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가 단지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적으로 나는 그래서 딸 아이 하나만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후회는 없다.
나의 이런 개인적 사연과는 다른 이유로, 지금 우리나라는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 집 건너 하나 낳기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야심차게 추진했던 1970년대 산아제한 정책은 아주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밖에.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어느 기관의 연구보고처럼 300년 이내에 지구상에서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소멸해 버릴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국가의 필수구성요소인 ‘국민’이 없어서... 그저 점점 노령화가 진행되다가 언제 사라질지 모를 극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가 아예 멸종될 수도 있다는 얘기.
상위1%를 위한 정치가 자행되고 부의 편중은 더욱 극대화 되고 사회 극빈층은 두꺼워져 가고 젊은 빈민층은 늘어만 가고... 사람들은 점점 그악스러워져 가고... 그 와중에 어느 제 정신 가진 부모가, 자식을 둘씩 셋씩 낳아 자기 자식들이 그 살벌하고 아수라장 같은 사회에 대물림된 빈곤층이 되어 가진 자들의 개가 되어 살게 하고프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