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기념하여 시댁에 갔다. 빈손으로 탈탈거리며 온다는 어머니의 예전 말이 비수가 되어 갈때마다 들르는 홈플러스에 들러 수박도 사들고 아가씨 아이 옷까지 사들고 말이다.
예전에 어머니가 했던 말들이 아직 내 마음에 상처가 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오빠에게 아무 내색없이 기분좋게 시댁을 향했다.
횟집에 외식을 하러 가자 할 때부터 고지식한 말들로 일관했다. 역시나 시어머니와의 외식은 늘 순조롭지 않았다. 아기를 낳으려면 살생을 안해야한다며 회는 절대로 안된다나? 그러면 고기도 살생이 아니냐고 신랑이 말했다. 고기는 죽은거라 괜찮단다. 고기는 죽여야 먹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자기 말은 무엇이든 맞단다.
그렇게 어렵사리 앞산에 있는 김치찜 집에 갔다.
즐겁게 식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화장실갔다온 사이 오빠가 쫓기는 목소리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 엄마, 부처님 오신날 장인 어른이 외국 갔다가 돌아오신 다음날이라서 엄마가 간 절에 같이 갈 수 없었어요.”
상황을 들어보니 부처님 오신날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이웃집 며느리는 따라 왔는데 나는 따라오지 않은 것이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면 나한테 같이 가지 않을래라고 전화라고 하든가? 내가 신인가 말도 안하는데 어떻게 마음까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다음달 출산을 앞두고 있는 만삭인 며느리가 꼭 거기까지 따라가야할까?
역시 말많은 시어머니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시동걸린 차처럼 자기의 불만을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신랑이 눈짓으로 준비해간 돈을 건네라고 했다. 나는 싫다는 눈짓을 하며 당신이 건네라고 했는데 그래도 신랑의 말을 들었다.
돈 10만원이 든 봉투를 건냈다. ‘어머님, 어버이날인데 얼마 안되지만 받으세요.’
나름대로 참아가며 상냥하게 말했다.
열어보지도 않은채 말씀하셨다. 봉투가 너무 얇다. 그리고 그 뒤를 쏟아져 나온 말이 압권이었다.
‘엄마한테 잘해야한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친정어머니한테도 잘해야 하고 말이다. 너희는 부자 아니냐? 섣나꼽제기같은 돈 이렇게 내미냐? 언제 한번 너희가 돈이나 제대로 같다 준적이 있냐?’
너무 답답했다. 속으로 하고 싶은 말들이 내 입을 뚫고 나오려했다.
매달 20만원씩 꼬박꼬박 붙여드리고 생신이나 특별한 날에는 10만원씩 더 드리고 명절에는 20만원씩 더 드렸다.
그런데 매달 계좌이체해서 드리는 돈은 돈이 아니단 말인가?
좋은 말도 한 번 들으면 알아듣는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부자라면서 말한단 말인가? 우리는 이제 결혼한지 삼년이 되었고 맞벌이를 해왔다. 열심히 노력했다. 이제 집장만하고 아이를 가졌을 뿐이다. 집장만한 것이 부자인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어머니 심보는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같이 식사하러 온 아가씨도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신랑도 멍하니 앉아있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말도 할 수 없을정도로 기가찼다. 계산을 핑계로 먼저 일어섰다. 이미 아버님이 계산을 하고 나가 서 계셨다. 그렇게 기분나쁘게 다시 신랑의 차를 타고 시댁을 향했다. 모셔다 드려야했으니까 말이다.
차 뒷자리에 앉아서도 어머니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친정에서도 잘해야한다고.....그런데 그 말이 친정에 잘해야한다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친정엄마도 용돈 많이 드리라고 계속 말하는데 그 말을 비꼬아서 하는 어투가 더 느껴졌다.
참다 참다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
“어머니, 친정어머니는 돈을 잘 드리지도 않지만 드려도 안 받으시려고 하더라구요.”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어머니가 말했다.
“아 머리야”
당신 말에 토단 것에 대한 답답함의 표시였던가 보다. 하지만 난 그 말 한마디 한 것만으로도 속이 너무 후련했다. 그렇게 시댁 가까이 다 갔을 때 그냥 걸어갈테니 세워달라했다.
신랑도 시댁에 들어가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자기 엄마가 집에 들어가면 더 심한 말을 할 거란 생각을 한 건지 그대로 내려드렸다.
그렇게 작년에 이어 또 한번 악몽같은 어버이날 행사를 했다.
난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너무도 일방적인 그리고 앞뒤가 안맞는 말을 쏟아내고 자신의 기분따라 행동하는 분......
그렇게 밖에 기억이 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