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고향 초등학교 대전분회의 동창회가 있었다.
그간 총무가 바빴던 나머지 연락을 잘 안 취하여 지지부진했던 모임이었다.
여하튼 어젠 모처럼 100% 모임이 이뤄져 다들 미간이 밝았다.
무더운 여름이고 하니 몸보신 차원에서 장어구이를 잘 하는 집에서 만났는데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예의 이구동성 레퍼토리가 다시 또 도출되었다.
그건 그 시절 우리가 살았던 천안 와촌동의 어떤 ‘잔혹사’에 대한 피력이었다.
“역전(당시는 천안역 부근이 시내의 가장 중심지였다)으로
나가자면 와촌동 뚝방을 건너야 했잖니?”
“그랬지!”
“한데 (당시) 개를 키우던 아저씨는 늘 그렇게
줄도 엄청 긴 송아지만한 큰 개를 이리저리 풀어놓아
나는 무서워서 감히 그 곳을 지날 엄두조차도 못 냈지 뭐니!”
“맞아! 난 그래서 일부러 내(川)를 건너 성정동으로 우회했지 뭐야.”
그랬다.
당시 그 개장수 아저씨는 뭘 잘 못 먹었던지 여하간 늘 그렇게 자신이
기르는 개를 하나도 아닌 얼추 일곱 마리 가까이나 되는 황소 같은 개를
뚝방 윗길에 죄 풀어놓아 우리네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어릴 적 기억은 평생을 가는 법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면 여전히 고운 시선으로
마음에 담고 있으되 반대의 경우는 지금도 손사래의 대상으로 각인되는 그런.
해마다 여름이 되면 이른바 ‘보신탕’이라 하여 개고기를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개고기와는 ‘앙숙’이다.
그것 말고도 여름철 몸에 좋은 음식은 지천으로 널린 외에도
굳이 불교적 개념으로의 접근이 아닐지라도 개고기는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까닭이다.
일전 바로 아랫집에서 오랜 기간 키웠던 개를 팔았다.
주야장천으로 컹컹거리며 동네의 일부까지를 맡아
불침번 역할까지 했던 녀석이었거늘 하지만 그 개주인은
개장수의 꼬드김에, 또한 돈에 혹하여 그만 개를 그예 팔아버리고야 만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 개는 자신이 팔려갈 팔자임을 인지한 때문으로 밤새 울었던 것인가 보다. 지금은 덜한데 예전엔 술에 만취하면 막역한
친구들이 날더러 “넌 술만 먹으면 개”라고 놀려댔다.
그런 폄훼의 곡절은 목적지인 대전역이 아닌 부산역까지 가서야 겨우 술이 깨는가 하면
비척이다가 하수구에 빠지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 때문의 이유 있는 지적이었다.
아무튼 어렸을 적에 그렇게 커다란 개들의 무리를 보며 자란 때문으로
나는 지금도 덩치가 산(山)만한 개, 특히나 집을 잃은 개를 보면 와락 겁이 난다.
그 시절 개를 전문으로 길러 팔았던 그 아저씨는 지금도 여전히 개를 기르고 있을까?
하여 묻고 싶은 말이 여전히 하나 정류(停留)한다.
“아저씨~ 개 팔아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