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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깍두기 마루타와 엔티크 스타일


BY kyou723 2007-07-10

미용사 기술도 전혀 없는 내가 남편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다.

처음엔 주위의 온갖 비아냥(?)을 감내하며 쥐가 뜯어먹은 것처럼 얼기설기 잘랐다.

이제 3개월째인데 제법 3년 먹은 서당개 흉내는 낸다. 미용학원에 다녔다면 단연 월반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렇다고 하산할 단계까지는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묵묵히 머리를 조아리며 마루타가 되어준 남편이 고맙기 그지없다. 이곳 독일에서는 머리카락 자르는 데도 예약을 해야 하고,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 그리 저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탓에 울며겨자먹기로 감내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시위플래카드를 내건다. 이제 미용실에 가서 자르겠다는 것이다.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고 이제야 내 실력을 펼쳐보이리라 다짐했는데 남편이 돌연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학생 후배녀석의 남자친구 머리스타일 때문이다. 얼마 전에 유학생 후배가 부잣집 소공자 같은 남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다. 한국에서 꽤 산다는, 부모님의 뒷배가 든든해서인지 남자친구의 머리 스타일도 그리 저렴하지 않는 미용실 작품이라고 한다. 왠지 모르게 멋스러움이 풍겨났는데, 깍두기로 잘라놓은 남편의 머리와 비교해보니 남편의 시위가 타당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후배녀석이 지갑을 샀다고 자랑한다. 브랜드를 보니 L브랜드로 명품이다. 재빠르게 그 값이면 소시지가 몇 박스고, 우리 딸내미 좋아하는 ‘악티멜’은 셀 수도 없이 살텐데... 역시 아줌마는 먹는 거 생각만 한다.

게다가 그 녀석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엔티크 풍을 선호한다. 후배집에 가보면 온통 엔티크 가구와 소품들이다. 한 번은 ‘엔티크를 좋아하는 것을 보니 너도 늙어가긴 하나보다’라고 비꼰 적이 있다. 물론 ‘가지지 못한 자의 슬픔’이라고 하기엔 아직 난 가진 게 많고, 가지고 싶은 것을 무조건 가질 만큼 내 자신에게 관대하진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엔티크 소품과 가구를 좋아한다. 고풍스럽고 질리지 않는 엔티크 매력에 푹 빠져본 적도 있다. 이곳 유럽에서도 엔티크 스타일은 오래도록 사랑받는 테마인 것 같다.

엔티크 스타일은 오래된 구공예품이어서 희소가치가 있으며 예술성까지 겸비해 아무리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가구나 침구 스타일을 말한다.

얼마 전에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프리드리히’ 거리를 거닐다 보니 엔티크 소품가게가 보였다. 베를린에서 명품의 거리하면 쿠담거리와 프리드리히를 들 수 있다. 쿠담은 주로 명품 브랜드가 즐비하며 꼭 백화점의 명품코너를 거리에 좌악 뿌려놓은 듯한 인상을 풍긴다.

아는 독일인의 딸이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을 졸업한다고 하길래 선물을 사기 위해 프리드리히 거리를 나섰다. 거리를 지나치다가 소품들이 눈에 띄어 들어가보았다.


▲ 유리잔인데, 컵 부분이 금빛을 띤 컵으로 새겨진 문양이 고풍스럽다.


▲ 식탁이 그윽하다. 문양이 멋스러웠다.


꽤 큰 화장거울


 ▲ 백설공주의 거울같은 느낌이 든다. 요 앞의 보석함도 화려하다. 집에 비슷한 게 있어서 그리 생경하진 않았다. 보석함이 29 유로 정도로 우리 돈으로 약 35,000원 정도?


 ▲ 일곱살 큰딸에게 사주고 싶은 레이스 달린 시계.


 ▲ 세트로 파는데, 무지 저렴했던 기억이 나는데...


 ▲ 여러가지 소품들

물론 그다지 비싸진 않았다. 그렇다고 덥석 집어 돈을 지불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내 일상의 엑센트로 눈요기감 정도로 해두자고 눈도장을 꼭꼭 찍었다.

가끔 베를린의 벼룩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오래되었을 것 같은 엔티크 스타일이 눈에 띈다. 한 번은 어떤 할머니가 파는 커피잔의 사용연도를 물어본 적이 있다. 얼마나 되었을까 궁금했다.

엔티크 스타일의 오래된 커피잔이었는데, 자신의 할머니가 사용한 거라고 해서 뒤로 자빠질 뻔 했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이미 박물관에 들어가 있었을 법한 시간인데...

오래도록 보존하는 비결과 그 아름다움이 유지되는 요인은 무엇일까. 빠르게 진화하고 빠르게 싫증내는 요즘 오래도록 간직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내가 이 땅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은 요동치는 계절과 날씨의 변동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과 지치지 않는 인내라는 것을...

남편이 미용실에 가겠다고 징징댈 때마다 결코 열리지 않는 견고한 지갑과 꿋꿋하게 남편의 머리카락에 가위질을 하며 내 이마 밑으로 승복하게 하는 인내력과 투지라는 것을...

엔티크 소품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마땅한 물건을 찾지 못하고, 주인 아주머니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채 매장을 나섰다.

그래도 햇살좋은 베를린의 하늘은 웃는다. 날 보고 웃는다.

오늘도 배운 게 있으니 “Wunderbar(놀라워)"라고 맘껏 칭찬하는 것 같다. 흐흐...




박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