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cy Dance | 낙서쟁이 https://blog.naver.com/harryhee73/220408457390
나른한 오후이다. 나는 아무런 간절함이 없을 때 때론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아무것도 간절하지 않은 상태, 기쁨도 과하지 않은 상태, 오직 나라는 존재만 그저 대충 존재하고 있는 상태에서 느끼는 평안, 그것이 주는 행복이 오늘 따스한 햇살과 뒤섞여 즐거워졌다.
평안함이 지루함이 되지 않도록 책을 펴 들었다. 쿤데라의 <삶은 다른 곳에>, 대충 뒤쪽 내용이 어두울 것을 알기 때문에 앞부분만 맛보았다. 순수한 소년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남성으로 눈 떠가는 풋풋한 모습에 웃음이 났다. 순수하기만 했던 시인의 어린 시절, 하녀가 샤워 중 벗은 몸을 열쇠 구멍으로 쳐다보며 두근 두근하던 순수하던 남자아이가 점점 성장한다. 여자의 몸을 의식하고 여자를 사랑하고 욕망을 느끼며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되면서 사귀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다소 무리한 지배욕과 배타적 소유욕을 가진다. 과거까지 자기 것이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감정까지 가진다. 거기에 순수하던 청년이 힘으로 여자를 제압하는 무력적인 자기 모습에서 쾌감을 느끼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남성의 가학성과 그에 저항하지 못하는 여성의 피학성이 인간의 속성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 있어서 적어본다. 실은 여성이 성행위나 성적 설정에서 피학적인 상황에서 자기도 모르게 쾌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여성이라는 존재 안에 숨겨져 있는 "폭력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에크하르트 톨레'는 '집단적인 고통체' 라고 표현한다. 오랫동안 남성에게 지배 당하며 통증을 느껴왔던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정서가 여성 안에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집단적 고통체 ? 성 전문가들은 그 '집단적 고통체'가 섹스를 할 때도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서 라면 상관 없지만, 대부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작용해서, 남녀가 서로의 몸을 향해 열려지는 섹스가 아니라 닫힌 섹스를 만드는 주범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섹스에 돌입했을 때 여성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사와 반하는데도 순종하거나 수동적으로 행하게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은 여자의 몸 상태와 무관한 강압적 삽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 등을 통해 나타난다. 강제적 삽입 시의 통증과 쾌감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보이지 않는 (유전자 속인지 어딘지에서 들리는)명령에 의해 상대 남자를 멈추게 하지 못한다.
Say 'Not Yet !" "Not Yet ! "이라고 하지 못하는 여성의 본성... 여성은 자기도 모르게 순종적(?) 쾌락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애무를 당할 때, 상대가 손을 제압했을 때, 과격하게 껴안아졌는데 움직일 수 없을 때, 그리고 때론 도구 등으로 손목 등을 결박했을 때. 그리하여 여성은 "Not Yet ! 아직은 (삽입할 때가)아니다"라고 말하지 못함으로써 자기가 도취되는 피학적(별볼일 없는)쾌감을 위해 섹스 전체를 망치는 것을 방조한다. 그것은 여성의 태생적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억압 심리의 일종이 정신에 이어져 내려와 은연 중에 여성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인데도 마치 여성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기라도 한듯 여겨진다. 실은 막상 당하는 여성 자신도 당장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설령 강제로가 아니라 해도 여성 스스로 그러리라고 수용하기도 한다. No More 포르노 흉내 이러한 잘못된 암묵적 동의는 주로 남성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포르노에서도 이어진다. 다소 짐승 같은 캐릭터의 남자가 여자를 제압하되 마치 상대를 강제로 소유하는 것 같은 과격한 섹스 묘사들, 마치 이것이 여성에게도 좋은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이런저런 것을 보면서 성인으로 성장한 남자야 알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모든 '성 상담'에서 여성들이 하나같이 토로하는 문제는 '통증'과 '흉내'에 관한 것이다. 여자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삽입함으로서의 통증, 그리고, 마치 포르노를 흉내내는 듯한 과격한 피스톤 운동이 여자에게 견딜 수 없는 불쾌감을 유발하고, 섹스 자체에 대한 부담까지 안겨준다고 고백한다.
No More 피학 & 가학 물론 뜨거워진 낯선 남녀의 순간적 불꽃 같은 하룻밤에는 어쩔지 모르겠다만 (아마 둘 다 충분히 미친 듯 달아올라서 가능할 수도 있겠으나), 지속적으로 관계하는 커플 사이에 이것은 남녀 간의 '성적 시간 차'와 '성적 감각 차'를 불러오는 핵심적인 문제점으로 볼 수 있다. 정작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은 정서적 육체적 결핍감에서 오는 남녀의 결합의 욕망이다. 이는 하나가 되어서 충만해지는 욕망이지 파괴와 가학이 아니며, 통증과 피학이 아니다. 이것을 깨닫는 데까지 많은 커플들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때론 이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서서이 멀어지는 쪽으로 결론지어진다. No More 주도 & 강박 언제까지 '사냥하고 사냥 당하기' 놀이를 할 것 인가? 이미 많은 커플은 서로에게 사냥된 사냥감들이다. 사냥 된 서로를 향해 여유있는 유희가 되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완전히 열린 몸과 마음 상태에서 자극을 위해 설정한 디테일로서만 가학과 피학을 허용하도록 한다. 즉, 섹스가 누군가가 주도권을 쥐고, 힘을 가하고 힘을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버리자. 발기나 삽입에 대한 강박증도 버리는 것이 좋다. 전희 단계에서, 지금 서로가 단순히 성기의 결합만을 위해 상대를 만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여유도 중요하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몇 시간 후 다시 발기할 수 있다. 지금 실시간으로 쇼를 보여줘야 하는 연극 무대에 선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성기 중심의 섹스, 제압하는 삽입, 힘을 보여주고 힘에 지배 당하고자 하는 섹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단계의 섹스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자. 그만큼 한계를 보이는 섹스이며, 극복되어야 할 관습적 섹스라는 것을 유념하자.
No More 연극, No More 흉내, 그리고 No More 가학과 피학! 결국 No More 포르노!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무중력에서 뒹구는 것 같은 섹스를 즐기자. 세련되게... 실은 이것이 더 여성에게 본연의 야성을 깨어나게 하며 그와 결합한 남성도 마찬가지다. ~no more? more...!^*^ 저는 유전적 요인이 아주 중요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해 왔습니다. 남자는 100퍼센트가 자위를 할까요? 중성적 존재들은? 새디스트나 메조히스트들은 단지 관습이,상황이 만들어낸 억지 춘향식 쇼이기만 할까요? 변태가 과연 어디까지일까요? 단정은 금물일 것 같아요. 내가 경험한 것만이 유일무이한 진리이다 라는 건, 종교 전쟁을 수천 년 간 계속하고 있는 면죄부 장사꾼들의 만행과 뭐가 다를까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부모님들이 보던 ,숨겨 뒀던 도색 사진을 보면서부터 자위를 시작했어요. 다 나 같을 줄 알았지만 전혀 성욕을 못 느끼는 친구도 있다는 걸 고등학교 때 알게 되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었고, 통계를 접하곤 뜨악해 하기도... 삽입 섹스 시 분수처럼 러브 주스를 뿜어대면서도 별 감흥을 못 느끼던 친구가 애널 섹스를 하면서부터 감동을 하는 모습도 직접 봤어요. 신나게 오르가즘을 나누다가 욕설과 학대를 갈망하는 나 자신을 보게도 됐어요. 펠라치오를 받으면서나 후배위 정도를 하면서, 살짝 새디즘이 돋는 걸 경험하기도 했고요 . 남자는,여자는...하는 식으로 ,시중의 왜곡된 성의식을 멀리하고, 나만의,내 짝꿍만의 특장점을 찾아서 어필하고 배려하며 ,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색하며 업그레이드를 해가는 성생활을 즐기면 좋겠죠? 저는 지금 6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매 섹스 시마다 업그레이드를 합니다. 어제의,이전의 섹스같은 섹스는 하지 않는다는 모토를 앞세우며... 20대보다,30대,40대,50대보다 훨씬 더 즐거운 성생활을 즐기고 있고요. 앞으로 70대,80대,90대가 돼도 그 나이먹은 하드웨어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마냥 즐겁게 살고 싶다. 지금으로선 자신도 있고...근자감이 아니란 증명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연구하고,행동하며 젊게,정신적으로육체적으로 살려고 애쓰고 있다. 아직까지는,내 여친들에 한하긴 하지만 30대 못잖은 헬스보이,핸섬남으로 인정을 받고 살고 있다,그럼 됐지 뭘 더 바라랴~^*^
--미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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