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면 불만사항이나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항에서 내 의견을 척척 잘 말할 것 같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요가 강사 일을 시작하면서부턴 더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씩 생각을 바꾸고 행동도 바꾸려고 하는데, 처음 요가강사가 되고서는 요가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수용해야한다'고 잘못 생각해왔다.
나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자꾸 잊는다. 그래서 타인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그때에는 참고 넘기다가 몇날며칠을 끙끙 앓고는 한다.
그것을 몇번 겪고 나니 더이상 이건 옳지 않다는 것을 체득했다.
수련자는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무례한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의 참는 태도가 누군가에게 '허용'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조심하려고 한다.
줄곧 참으며 지내오니 이제 이러면 안된다는 걸 알더라도 바르게 대처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무례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하게 말하려고 한다.
나를 병들지 않게, 나를 지키면서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것.
내가 건강하고 선을 잘 지켜내야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부드럽고 너그러워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몇몇의 무례한 사람들 때문에 모두를 등돌리고 싶어진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처음에는 날카로울 지라도 혹은 너무 뭉툭할지라도 점점 바르게 대처해 나갈수 있을거라고 믿으며.
"인생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참기만 하면 스스로 무기력해진다는 걸 알았다.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걸 방해하는 외부 소음에는 여유롭게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사람들의 이상한 말에 분명히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무례한 사람들은 내가 가만히 있는 것에 용기를 얻어 다음에도 비슷한 행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자신감 있고 자기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면 '남자답다', '카리스마 있다'라고 하지 '당당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 남자가 당당한 건 당연한 거니까.
이처럼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편견은 여성들 스스로 행동에 제약을 두게 한다.
실제로 여자들은 말하고자 하는 내용보다 그 내용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그러다 결국은 말하는 자체를 포기해버리곤 한다. 버릇없어 보일까 봐,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서다.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는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서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가족은 내게 무한한 사랑과 안정을 주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를 나 자체로 사랑해줄 수 있는 친구와 연인에게 집착했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놓지 못했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면서도 참았다.
사랑받음으로써 쓸모를 증명하려고 했고,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눈치를 보는 습관에 젖어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상대방을 고려하느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기도 한다. 비극적인 드라마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에서 벗어날 것. 그럴수록 너를 함부로 대해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 주변에 늘어난다. '내 인생은 원래 불행해'라고 말하는 걸 그만둬라.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자존감의 문제와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착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남에게 'NO'를 말하기 힘들게 하고, 눈치를 살피다 보면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결국 "알아서 해주세요."가 반복된다.
그때의 나는 '괜찮아'를 연발하느라 늘 헉헉거렸다. 나보다 상대를 배려하느라 정작 나 자신은 전혀 배려하지 못했다.
에너지 흡혈귀란 상대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나 육체적, 정신적, 심리적인 방법으로 상대의 기를 빼앗고 분노하게 만드는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요즘 신조어 중 하나인 '후려치기'가 있다.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상대를 깎아내리려 하는 행동을 뜻한다.
상대가 당신을 지나치게 비난하고 염세적인 표현을 주로 하진 않는가?
그가 하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상대의 말보다 나의 직관과 감정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저 사람을 만나기 전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다르지? 저 사람 곁에서 나는 더 나빠진 걸까, 더 좋아진 걸까?
나는 명품 가방을 산 게 아니라 '서울의 멋진 직장여성의 세계'에 진입하는 입장권을 산 거였다. 하지만 그건 실체가 없는 이미지였을 뿐이므로 가방을 아무리 사더라도 행복은 딸려오지 않았다.
요즘도 가끔 우울한 날이면 뭐라도 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일상은 굴욕적이지만 쇼핑의 세계에서는 소비자로서 배려와 존중을 넘치게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럴 때는 그저 그 상태임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도움이 된다. 카드를 꺼내기 전에 먼저 나를 다독여주는 것이다. '너 요즘 많이 힘들구나.' 하고.
마스다의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서는 주인공 수짱이 자꾸만 한 직원을 싫어하게 되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을 결말로 택한다. 그 직원을 바꾸지도 않고 수짱이 마음을 완전히 고쳐먹지 않아도 되는 이 결론은, 각종 자기계발서에서 줄기차게 말하는 진취성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마스다 미리는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선택일 뿐이라고 말한다.
우리 엄마가 4대 독자인 내 남동생을 낳고 "건강히만 자라라"라고 했던 것처럼, 사는 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다. 사회는 무책임하게도 개인에게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떠넘기고 개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우물쭈물 답을 찾고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반대로 생각하면, 별 쓸모가 없는데도 살아 있으니 더 대단한 일 아닌가. 그러니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주변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준다. 딱히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인간이 타고난 것 중 가장 위대한 능력인 이유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끝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에게는 모두 단점이 있으며 빈틈과 약함, 예측불가한 모습들이 있다. 많은 욕망과 여러 관계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나 외부의 조건에 맞추어 그에 맞는 모습만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입체적 존재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관된 모습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나만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의외의 모습들이 모여 완성된다.
취향이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단지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일 뿐이라면, 일기를 검사받는 것과 뭐가 다를까. 내가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 남들의 취향에 대해서도 무시하지 않아야 세상은 여러 색으로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대한 반응이 염세로 빠져버리면 더욱 나빠질 일만 남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아예 대화를 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되므로. 집을 오래 비워두면 집은 그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이곳저곳 망가져 간다.
세상을 무조건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최소한, 세상을 바꾸진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지지 않을까?
인생 자체는 긍정적으로,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누군가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을 때는 섣불리 대답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질문자의 의도를 곧바로 알 수는 있지만 대답하기 불쾌한 경우에는 딴청을 부리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어 "너 페미니스트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네", "아니오" 같은 대답부터 하지 않고 "페미니스트가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또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물어보는 식이다.
스스로의 논리가 빈약함을 깨닫고 급히 화제를 돌리게 된다.
질문자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대답하기 꺼려지는 질문, 논쟁이 예상되는 질문에는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토론을 할 수 없다.
보통 상대가 나를 훈계하거나 떠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별로 생각을 안 해봤어요"하고 나의 패를 내보이지 않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대화를 빨리 종료하는 기술이다.
일상에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행동은 부적절했어요", "불편하네요"처럼 경고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다면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결핍은 그 자체로는 연약하지만 스스로 그것을무엇이라고 믿고, 남에게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위대해질 수 있다.
한국처럼 서로 자존감을 낮추는 데 바쁘고 권위적인 곳일수록 더더욱 이런 힙합정신이 필요하다. 남들이 하는 평가를 그대로 믿지 않고,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리스펙하는 것. 그렇게 되면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라고 할 때 가만히 있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제지하거나 불쾌감을 표현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냥 두고 피해받은 자신을 책망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신의 감정을 믿어라. '불쾌하다'는 감정은 원래 주관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허락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두 번째로 할 일은 웃지 않는 것이다. 정색하면서 거부하기가 힘들더라도 최소한 웃지는 말아야 한다. 많은 여성은 성희롱을 당했을 때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 웃어버리곤 한다. 거절할 때조차도 너무 단호하게 들릴까 봐 머쓱하게 웃는다.
가해자는 이를 악용한다. 상대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다거나 적극적인 거부의 의사를 알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는 것이다.
불편한 말에는 어설프게 대응하는 것보다는 아예 '읽씹'을 하는 것도 유용하다. 상대가 눈치를 보게 하자.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면 금세 감격해.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자기 자체로 사랑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자꾸 무리라고 확인받으려다 망가지는 거야.
자신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꽥 하고 터져.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갈구하거든. 인정이랑 배려 같은 거.
다소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당하듯 누구나 1인분씩의 불운을 만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시간이 많이 지나도 흉터에만 집중해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남을 미워하는 데서 헤어나지 못한다.
불안 증상 중 하나로 '가면 현상'이 있다. 자신의 진짜 능력은 보잘것없다고 믿으며 이 사실이 남에게 알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을 뜻한다.
가면 현상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깎아내리거나 자신에겐 실제로 그 일을 할 능력이 없지만 하는 척만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기꾼처럼 여기는 것이다.
스스로 '나는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주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꾸준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렇게 믿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때로는 무례한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수는 없다. 사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할 때 더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이다.
무례한 발언을 자주 해서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집안의 어른이나 직장 상사인 경우라면 현실적으로 화를 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참고만 있기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서로 상처받지 않고 대화를 종결하는 데 필요한 자기만의 언어를 준비해두어야 한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 주로 두 개의 문장을 사용한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다.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무덤덤한 인식은 상대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는 다짐이 되기도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거대하게 느끼다가는 정신력이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죽지 말자. 매일 조금씩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거절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다. 거절에 필요한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일일이 상처받지 않는다'와 '상대방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다.
나는 누치를 자주 보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말을 하면 지나치게 반성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던지는 말조차 오랫동안 곱씹었다. 소속된 집단에 대한 나쁜 말을 ㄷ르으면 예외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문제라고 제기된 것이 과도한 일반화나 지나친 우려는 아닌지도 따져보저ㅏ.
바로 수긍하지 말고 근거와 의도를 확인하는 것이다. '요즘 --은 ~하다'는 식의 이야기들은 대개 증명 없이 쉽게 내린 단정이며, 걱정인 척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며 우월한 지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주변의 소움을 낮춰야 한다. 가끔은 남이 자신을 방해할 때 '쉿'을 외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작 나의 목소리가 묻혀 세상에 들리지 않게 될 테니까.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하고 예언하기를 좋아한다. 주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에게든, 친구들에게든, 회사동료에게든 "너는 ~한 사람이야", "너는 ~할 것같아"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 말들을 자꾸 듣다 보면 당사자도 믿어버리게 된다. 정말 그렇게 될 것만 같다고.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이 당신을 평가하거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하고 넘겨버려라. '그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하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나를 잘 모를 뿐더러 나에 대해 열심히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의 과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나뿐이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려 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다짐한다. '사람들이 말하게 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자.'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저하는 법
첫번째는 문제가 되는 발언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누군가 그 선을 넘었을 때 경고하는 것은 언어 폭력에 대처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편견이 심한 말을 들었을 때, 흥분하지 않고 "제3자가 듣는다면 오해하겠는데요?"라고 말하거나 "당사자가 들으면 상처받겠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감정을 싣지 않고 최대한 건조하게 말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되물어서 상황을 객관화 하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 못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게 되물으면 더욱 좋다.
세번째는 상대가 사용한 부적절한 단어를 그대로 사용해 들려주는 것이다.
네번째는 무성의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만 보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군요', '넹'정도의 표현만 의도적으로 반복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자꾸 참으면 내가 무기력해진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나만의 대처법을 갖춰야 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떨어? 하는 사람에게 그 평안은 다른 사람들이 참거나 피하면서 생겨난 가짜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남들이 지적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도 함께 없어지고 만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단점이 있더라도 특정한 장점이 크게 발휘되는 사람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원래 반짝거렸던 것들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수정하다 보면, 결국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게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