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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과 어머니의 편지


BY 임진희 2000-06-12

나는 칠남매의 막내딸이였다. 오빠셋 언니셋이 있고 내가 태어

났을때는 어머니가 이미 마흔 중반이셨다. 어릴적에는 철이

없어서 학교 졸업식에 오신 어머니의 흰 머리가 부끄러워서

장녀로 태어난 다른 친구를 부러워 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

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둘이서 생활 하다가 내 나이 스물다섯

되던해 중매결혼을 하게 되었다. 막내딸을 시집 보내신 우리

어머니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늦게 낳아 시집 보내기 전에

당신이 돌아가실까봐 늘 걱정 이셨던 어머니 셨다. 그러던 내

가 남편을 만나 신혼 시절의 보자기를 풀었던 곳은 전남 순천

이였다. 남편이 처음 발령 받은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개인

사무실을 갖고 있지만 그때는 공무원이였다. 그곳은 오후 세시

가 되면 라디오도 끊기는 곳이였다. 큰방 옆에 작은 방이 붙어

있어 명색은 방두개 딸린 것을 시댁에서 마련해 주어서 오로지

남편 한사람 만을 기다리는 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때 물가는

큰 식빵 한봉지가 120원 하던 때였다. 주먹 만한 사과가 20원

이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생활 하던 도중에

빵값은 그대로였지만 양은 이미 줄고 있었다. 주인 집은 할머

니 한분이 사셨는데 대한도덕 협회라는 이름도 생소한 종교를

믿고 계셔서 거의 매일 나가시고 나혼자 집 지킴이가 되어

남편이 올때까지 벙어리 아닌 벙어리가 되어서 하루종일 할일

없이 오전에는 라디오를 오후가 되면 신문을 뒤적이는 따분한

생활이였다. 낯설고 물설은 곳이라 아는 사람 하나없이 그야

말로 남편이 전부인 생활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생소한

편지를 받았다. 처음 보는 글씨체라 유심히 살펴보니 이름은

분명 우리 큰 오빠 이름인데 글씨가 영 달랐다. 그때 오빠는

공직에 계셨고 글씨도 잘쓰셨다. 글씨는 삐뚤 빼뚤 했다.

나는 궁금해져서 봉투를 뜯고 내용을 읽으며 눈앞이 뿌였게 흐

려갔다. 그것은 우리 친정 어머니 글씨였다. 우리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오셨다. 그 시절 외 할아버지가 학교를 보내지

않으셨는데 글은 어깨너머로 깨우치셔서 읽고 계셨지만 글 쓰기

는 그 때가 처음이셨다. 시집보낸 막내딸이 걱정 되셔서 생전

처음 편지를 쓰셔서 마음과는 달리 펜을 쥔 손이 부들 부들

떨리셨다고 한다. 비뚤어진 글씨속에 어머니의 사랑과 그 아픔

이 전해와 내 가슴을 쳤다. 라디오도 끊긴 그 시간에 닦고 닦

아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었다. 그 편지를 계기로 우리 어머니

의 글쓰기는 점점 늘어갔다. 노인이 무에그리도 감성이 뛰어

나셨든지 겨울이면 싸락눈 이 소리도 없이 내리는 구나. 엄마

는 밤에 이글을 쓴다고 시작하여 봄 이면 목련꽃이 활짝 피었구

나 빨래를 하다 말고 네 생각이 나서 펜을 들었다 ,등등 계절

에 맞게 편지를 보내셨다. 친정집 마당에 큰 자목련이 있는데

지금도 어디를 지나다 목련꽃을 보면 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젖는다. 이제 돌아가셔서 비뚤어진 어머니 편지도 받을 수 없

게 되고 말았다. 자식을 키워 봐야 안다던가. 하지만 나는

아직도 속 깊은 어머니의 마음까지는 알수 없는 지도 모른다.

오빠와 함께 사시기를 거부하고 홀로 사셨던 어머니 가는 날과

함께있는 날은 다른것이라며 ....

그 외로움인들 어떠 하셨을까 항상 쾌활 하셨던 어머니의

속깊은 외로움을 이제야 조금 알것같다.

당신 돌아가실 자리 미리 마련 해두시고 자식들에게 폐끼치지

않으셨던 깔끔한 어머니 셨다. 수의도 당신 손으로 손 재봉틀

돌려 미리 만드셔서 해마다 거풍시키고 좀약 넣느라고 애쓰셨

던 어머니 셨다. 어제 일요일 날 조카딸 결혼식에 들렸다가

산소에 다녀왔다 땅이 좁은 나라에서 매장문화 가 요즈음 문제

점으로 대두되어 있지만 이렇게 산소에 않아서 마음속에 담긴

얘기 풀어놓고 있으면 산소가 웬지 좀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한

다. 남편과 나는 화장 하겠다고 이미 합의를 본 상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