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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BY 무명 2000-08-10

◆ 조선일보토론장에서 퍼옴 2000-08-09 오후 8:19:24 (22)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잘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집단행동에 대한 강제 진압일 것이다. 그래서 하물며 전두환, 노태우 집권 시절 강제진압 장비들을 태국이나 필리핀에 수출하였다는 뉴스를 접한 적도 있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이라? 이들이 집단행동을 한다? 정부는 애당초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예상한 바도 없었으며, 설마 이들이 집단행동한다고 해도 무난히 강제 진압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실제 지난 수년동안 의사협회에서 의료수가를 올려달라고 하면, 때맞추어 의사들을 세무조사한다느니, 의료비 과당 청구를 조사한다느니 등등.. 의사들을 위축시키는 뉴스를 메스컴에 도배하여 이들의 정당한 요구마저 묵살해왔다. 의약분업 논쟁이 가속되고 실제 1차 의료대란 때 만 해도 기존의 진압방법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즉, 의사들이 현재 시행되고 있는 의약분업안의 부당성, 왜곡성을 지적하자 정부는 그동안 손해를 벌충하는 방법으로 묵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약가마진에 대해 의사들이 부도덕하게 폭리를 취해왔다며 언론을 도배함으로써 의사들을 비난하는 국민여론을 형성하였다. 이 인위적 여론을 무기로 의사들의 정당한 주장마저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는 지금의 의료대란 뿐만 아니라 소수 국민에 의한 집단투쟁을 늘상 이런 방법으로, 그 집단의 약점을 들추어냄으로써 국민으로 부터 소외시키고, 그 다음 여론을 등에 업고 이들을 힘으로 강제 제압하는 비열한 방법을 택하여 왔다. 최근의 예를 살펴보자. 지난 4월 총선때 정부와 시민단체와 언론이 야합하여 제거하고픈 현역국회의원들의 약점을 들먹여 낙천, 낙선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던가? 천하의 정치꾼들인 국회의원마저 이 정부의 교묘한 덫에 걸여 그만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물며 가장 나약한 지식인인 의사들이야 정부가 어린아이 손목비틀기 한번으로 끽소리 못하고 정부가 마음대로 정한 의약분업안을 따를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하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정부의 판단이 빗나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의사들은 매우 단순하다. 이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온순한 모범학생으로서 부모와 학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주위에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단순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 제대로 판단못하는 사람들이 이전의 그 어떤 집단과 달리 정부와 사상 유래없는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어찌 분명 어린아이 손목비틀기보다 쉽다고 생각한 싸움 아닌 싸움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고 있는가? 많은 국민 뿐만 아니라 싸움을 건 당사자인 정부마저 지금 내심으로 당혹해 하고 있다. 서생들은 공부밖에 모른다. 세상 물정이 어둡다. 지나가다 물벼락을 맞아도 상대에게 욕하기는 커녕 오히려 물뿌리는데 지나가서 죄송하다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바로 서생이다. 주위의 대부분 사람들은 부당하게 입은 손해에 대해 항변 한번 제대로 못하는 서생들을 오히려 바보 취급한다. 그런데 이렇게 온순하고 바보같은 서생들이 왜 갑자기 사납고 막가파식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이들은 그들이 신봉하고 있는 신념이 부정되거나, 진리가 훼손되거나, 자존심이 붕괴될 때 갑자기 돌변하여 추호도 물러섬이 없고 사생결단식이 된다. 지금 정부가 가장 오판한 것이 이점이다. 의사들이 바로 서생이란 것을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자본주의, 개인주의가 판치는 요즈음 서생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청렴교수, 선비교수라는 넘들도 관직을 주면 덥석 받아 먹을 뿐만 아니라 교단에서 그렇게 정부를 비난하던 이넘들도 관직을 쓰면 언제 그랫느냐는 식으로 싹 변하는데, 아무런 힘없고 빽없이 그저 환자보며 세무조사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의사들이야 어찌 서생일 수 있을까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천만이 말씀.. 한국 의사들이야 말로 이 시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내 조국에 남아있는 서생들이다. 이들의 삶의 양식과 직장에서의 위계질서, 학문탐구방식, 세상에 대한 무관심 등등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이들이 서생에 가장 가깝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서생을 그대로 빼닮지 않았는가? 지금 행해지고 있는 의료대란을 잘 살펴보자 의사들은 그들의 호소와 주장이 무참히 묵살되고 오히려 개약되자, 그들의 신념과 반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상대방이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는 집단이라고 판단하자, 죽기살기식으로 투쟁하고 있지 않는가? 국민들과 언론과 정부는 이들의 지금 투쟁을 생명을 볼모로 한 막가파식 집단이기주의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러면서 단순 노동자 파업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정부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노동자 탄압 방식의 위협이나 강제 진압으로 이들을 절대 진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 그러면 그동안 간간히 있었던 지식인들의 투쟁은 사이비였단 말인가? 예를 들면, 언론인 탄압, 교사 탄압, 원전관련 학자 탄압, 등등 지식인 관련 투쟁들이 꽤 있었다. 물론 이들 역시 지인식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물정 어두운 서생들은 결코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지 않고 세상돌아가는 것에도 관심있으며 어떻게 요령있게 살아 갈 것인가에도 관심있는 단지 영리한 그런 집단일 뿐이다. 물론 위에서 순서정한대로 뒤쪽이 순수 서생에 가깝긴 하지만...

그러면 정부는 의료대란을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 것인가?
의사들이 서생이라는 현실을 바로 봐야 할 것이다. 진정 서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카멜레온으로 남아 있는 한 절대 이들 서생들과 대화할 수 없다. 국민들에게 의사들을 마치 무대뽀식 막가파 집단으로 홍보하는 한, 그리고 집단이기주의 집단으로 몰아 붙이는 한 이들과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이들 서생들과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적당주의를 버려야 할 것이다. 언제던지 변질될 수 있는 타협안을 들고 논의할 생각이랑 추호도 대화할 생각을 버려라. 진정 국민의 건강권을 지킨다는 본래의 취지인 순수한 목적과 마음으로 대화에 임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방법도 의사들의 저항을 종결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랫만에 서생들의 저항운동을 보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기쁘기 한량없다. 이 나라에 지식인 뿐만 아니라 무지랭이 국민들도 선비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전통은 귀찮고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우리들의 못배운 아비, 할아비들도 선비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일제시대 내목을 자를 지언정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조상들이 외쳤을 때, 외세가 무어라고 생각했는가? 이들 조상들을 어리석은 막가파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지금의 의료대란이 이와 무어 다르단 말인가?
정부는 대오각성해야 한다. 시민단체를 포함한 온 국민들을 더 이상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는 기회주의자로 만들지 말 것이며, 소신과 신념으로 살아가며 이러한 가치를 귀중하게 여기는 국민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 정부는 과연 후대에 나라를 망친 정부로 기록될 것인가, 아님 나라를 살린 정부로 기록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