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 의료계의 문제를 푸는 시각과 일반인의 시각 그 차이점 : 좋은 글입니다.
제 목 : 좋은 글입니다. [펀글]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한 좋은 글입니다.
저는 대학병원에서 전임의로 일하고 있는 내과의사입니다. 의료계의 문제를 푸는 열쇠에는 의료계의 시각과 의료행정가를 포함한 일반인들의 시각이 이번에 크게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보내드립니다.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보면 참 신기합니다. 의사들과 행정가 (정부 및 의료관리학교실 등 의료행정계의 사람들) 및 언론과 시민단체는 말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의료계의 문제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이는 실제로 현장에서 환자를 직접 보는 의사들과 환자를 직접 보지 않는 행정가와 언론 및 시민단체의 시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각의 차이는 첫번째, 환자를 집단으로 보는가 (Top-down approach), 개인으로 보는가 (Bottom-up) 의 차이입니다. 두 번째는 건강한 다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픈 소수를 주로 생각하는가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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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가의 시각과 의사들의 시각의 차이 : Top-down 식 접근과 Bottom-up 식 접근
작년 말부터 계속 의약분업을 필두로 하는 의료계의 문제가 핫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 중 상당후가 약값이 거품이라는 둥, 적자에 시달리는 의료보험재정이 곧 파산할 거라는 둥 돈타령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의료계의 문제를 놓고서 싸울 것은 돈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문제는, 환자가 얼마나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감기약을 쉽게 타건, 좀 어렵게 타건, 국민 건강에는 별 영향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급하거나 지속적인 의료서비스가 필요한 환자들입니다. 암환자가 제대로 항암치료나 수술을 받고, 급성심근경색증 환자가 재빨리 응급실로 가서 혈전용해제치료와 부정맥 치료를 받고, 당뇨병이나 고혈압 환자가 혈당과 혈압을 잘 조절받
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고 돌보고자 의사와 병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행정을 하는 사람들은 의료를 전체적인 면에서만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의료를 위에서 아래방향으로 내려다 봅니다. 좀 냉정하게 표현하면, 의료비를 덜 쓰는 경한 환자들을 많이 치료할 수 있으면 의료비를 많이 잡아먹는 중환자들은 좀 희생되어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의료보험규정에 따르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는 환자
는 14일 후에는 산소를 분당 15 liter 이상 주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체적인 통계수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상을 보는 의사들은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보면서 진료합니다. 당연히 모든 환자, 특히 중한 환자일수록 열심히 치료합니다. 환자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받아야 하며, 희귀병을 앓고 있다거나 치료비를 많이 쓴다는 이유로 천대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의료의 평가기준은 돈을 얼마 들여서 얼마만큼 많은 수의 환자를 치료하였다고 평가하는 방법은 그리 적절하지 못합니다. 항상 중환자는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각 질환을 앓는 환자들이 얼마나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았는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의료보험 예산으로 2조원을 들여서 국민 몇천만명이 혜택을 보았다고 해서는 실제 국민들이 받는 의료서비스의 수준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습니다. 각 질병을 앓는 환자들 - 고관절골절환자가, 만성신부전환자가, 임산부가 얼마나 좋은 의료서비스를 어떠한 가격으로 받았는가를 각각 따져야 비로소 환자들이 얼마나 좋은 치료를 받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의료의 문제는 특정한 기준을 일률적으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Top-down 방향이 아니라, 각 환자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면서 중심되는 문제점을 모아가는 Bottom-up 방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각각의 환자들의 이익을 위한 일이며 따라서 의사들이 하여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언론과 시민단체의 시각과 의사들의 시각의 차이 : 다수의 건강한 국민과 소수의 아픈 환자
의료보험이라는 제도는 아픈 소수의 환자들을 위해 건강한 다수가 돈을 내는 사회보장제도입니다. 아픈 사람들은 항상 소수이지만 비용을 많이 쓰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직접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아픈 사람들을 위한 비용을 내는 것을 꺼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픈 사람들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 매우 문제가 큽니다. 그러면 아프다는 것은 곧 파산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들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나 부담하여야 할까요 (월급의 5% 를 뗄 것인가 10% 를 뗄 것인가), 그리고 아픈 사람들의 값비싼 치료비를 아픈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부담하여야 할까요 (공짜로 모두 보험에서 받을 것인가, 절반만 받을 것인가, 전액 부담할 것인가).
바로 여기서 여기서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알맞는 의료보험재정의 정도를 정부와 국민들에게 설득해서 얼마나 돈을 거두어서 의료보험에 쌓아서 아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모두가 합의를 볼 수 있도록 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사들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언론과 시민단체가 나서서 할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또한, 아픈 환자들은 사회적으로 소수이자 약자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많은 시민단체가 있지만, 미국의 familiesUSA (http://familiesusa.org) 와 같은 환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강력한 단체는 전무합니다. 투석을 계속해야 하는 만성신부전 환자들, 값
비싼 약을 많이 쓰는 백혈병 환자들, 섬세한 조절이 필요한 소아당뇨환자들과 가족들은 보다 좋은 치료를 저렴하게 받을 수 있도록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론과 시민단체는 국민 대다수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소수의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의료계의 문제에 대한 시각이 이와 같이 다르기 때문에 언론과 시민단체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의사들은 이제 말을 할만큼 했다고 봅니다. 이제는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소수의 고통받는 환자들의 입장을 생각해 볼 때입니다.
감기약을 사기 힘들다고 투덜거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고통을 받고 의료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만성신부전환자, 망막출혈환자, 간암환자, 심장병환자들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치료를 저렴하게 받을 수 있는가 언론과 시민단체는 따져야 합니다. 그러한 환자들이 좋은 치료를 잘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자 다들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
3) 의료의 3대 요소 - Accessibility, Quality, Cost
조금 딱딱한 말이지만, 의료의 3대 요소는 Accessibility, Quality, Cost 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cessibility 는 환자가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얼마나 빨리 받을 수 있는가 입니다.
응급실 진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신문에는 잘 나지 않는데, 암 등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환자가 해당 전문가에게 빨리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Quality 는 이름 그대로 의료의 질입니다. 즉, 환자가 얼마나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치료의 결과 뿐 아니라 치료를 얼마나 편하게 빨리 하느냐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백내장 환자는 그냥 혼탁해진 수정체를 제거하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볼 수도 있고 인공수정체를 넣어서 안경을 쓰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도 있습니
다. 당연히 후자의 의료의 질이 높습니다.
Cost 는 말할 것도 없이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하여 지출하는 의료비입니다. 같은 의료비로 많은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좋죠. 그렇지만 환자마다 필요한 의료비는 상당히 크게 다릅니다. 임산부가 출산하는 것은 몇십만원 내에서 해결이 되지만 백혈병 환자가 치료받으려면 기본적으로 1,2 천만원 정도가 필요합니다.
자, 이제 그럼 현재 우리나라 의료정책의 방향을 생각해 봅시다. (1) accessibility 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 아닙니다. 의약분업시행으로 좋건 나쁘건, 약을 타는 것은 많이 불편해졌습니다.
(2) quality 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까 ? 무관심합니다.
(3) Cost 를 줄이고자 하고 있습니까 ? 의료보험재정의 적자를 줄이려고는 하였습니다. 대신 국민들의 부담은 그만큼 더 증가하였습니다.
이번에 크게 바뀐 의료정책은 의료의 세 요소 중 무엇 하나 좋아진 점이 없습니다. 의료서비스를 쉽게 받을 수 있게 하지도 못하고, 의료의 질을 높이지도 못하고, 돈을 절약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 도데체 무엇을 위한 의.약.분.업. 이었을까요 ? 단지 우리나라의 의료정책이 졸렬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
우리나라 정부의 의료정책은 환자를 위하고자 하는 방향이 아닙니다. 의약분업이 어쨌든, 의료비가 어쨌든, 우선 의료에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환자가 어떻게 잘 치료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건복지부의 시각부터 바꾸어야만 우리나라 국민들이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국민소득 GNP 에 상한선이 없듯이, 의료서비스의 질도 상한선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서울대병원 순환기내과 전임의